옛 '쉐장시' 기억 남은 목장…"잘되면 집 마련, 때로는 손해"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6.삼리공동목장 ②
밭농사 중심 애월지역 우시장 없던 1960년대까지 번성
삼리공동목장에서는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중요한 목축문화의 하나인 '쉐() 장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가치있는 발길이 됐다. 쉐장시는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우마를 거래했던 상인들로, 애월지역에는 예로부터 밭농사를 크게 했던 농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밭갈이용 '밭갈쉐'들이 집집마다 많았다. 그리고 연자매를 돌리거나 운송용으로 길렀던 조랑말들도 많아 이들을 매입한 후, 일정 기간 길러 판매해 이익을 남겼던 쉐장시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었다.
사람·쇠 다리 합해 '육바리 장시'
지난달 5일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양두행씨(78·애월읍 봉성리)에게서 중요한 목축문화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린 '쉐() 장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얼마 남지 않은 옛 '쉐장시'다.
1960년대 봉성마을에서 쉐() 장시를 오래했다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농사를 짓다가 30세부터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인 1960년대만 해도 제주도에는 우시장이 없어 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산 소와 조랑말에 대한 국내외의 수요가 있어 우마거래를 통해 제법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양씨는 "1960년대에는 직접 말 30필과 암소 15마리를 기르기도 했다"며 "이 우마들을 기른 곳은 6소장 하잣성 아래에 위치한 '흘축밭' 삼리공동목장이나 집의 마방"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마를 구입하기 위해 봉성리와 인근 마을의 공동목장, 그리고 남제주군의 여러 마을들과 한림읍 금악리부터 구좌읍 세화리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며 좋은 우마를 고르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쉐() 장시를 하면서 꼭 이득만 얻는 것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손해를 보기도 했다.
양씨는 "경험이 많은 쉐장시들은 이득을 크게 남겨 남부럽지 않은 집이나 땅을 살 수 있었다"며 "하지만 소를 비싸게 사놓고도 서울 우시장에서 소 경매가가 낮아 손해를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가격을 받는 시기로 음력 4월 말을 꼽으며 "이 때 서울 마장동 우시장으로 공급되는 제주산 소의 시세가 높았다. 이 시기에는 육지 소들이 논갈이에 들어가 우시장에 많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양두행씨의 기억으로 태어난 지 3개월 정도 된 송아지를 구입해 마방에서 1년 동안 기르면,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비육우로 성장했다. 송아지를 100만원 정도에 구입해 1년 동 안 기르면 250만원 정도에 팔 수 있었다. 비육우로 기르기 위해 집에서는 촐(꼴)에 사료를 섞어 먹였다.
조랑말은 일본상인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구입했다. 조랑말의 매입가는 정해져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동됐다. 3세 이상의 조랑말을 대상으로 매입해 일본상인에게 넘겼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랑말 고기를 통조림 제조용으로 이용했다.
산지에서 조랑말의 매입가는 1두당 대체로 20만~30만원 정도였다. 우마 매입에 필요한 비용은 본인이 부담했다. 현금이 부족한 경우 외상거래를 하거나 현금을 보유한 개인에게 월 4푼의 비싼 이자를 주며 빌린 돈으로 매입했다.
한편 공동목장에서 구입한 우마들은 현장에서 바로 트럭에 실어 한림항이나 제주항으로 운송했다.
말 1마리당 운송료는 2만원 정도였으며, 운송료는 본인이 부담했다. 우마 운송용 트럭이 도입되기 전에는 일꾼을 빌어 항구로 운송했다. 마을 청장년들이 우마 운송에 참여했다. 보통 큰 소 2마리를 제주항으로 운송하는 비용은 15만원 정도였다. 소 20마리를 운송하기 위해 일꾼 10명을 고용할 경우, 운송비는 150만원 정도 발생했다. 우마를 고 봉성리에 출발해 광령리를 거쳐 제주항에 도착하는데 4~5시간 걸렸다.
제주항에서는 대한통운 배를 이용해 목포항으로 운송했다. 오후 5~6시께 제주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날 오전에 목포항에 도착했다. 우마를 배에 실은 쉐() 장시는 같은 배로 가거나 아니면 우마를 배로 보낸 뒤, 비행기로 가기도 했다.
우시장이 열렸던 서울 마장동에서는 처음 자유판매제로 우마가 거래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판매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사기를 당하는 피해사례가 발생하면서 정부에서는 자유판매제 대신에 위탁판매제를 시행해 안전하게 우마가 거래될 수 있도록 했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이 마을은 집안마다 서로 다른 낙인을 사용했는데 양집에서는 클거(巨), 홍집에서는 돌치기 , 강집에서는 가운데 중(中)을 사용했고 그 외에 갑갑(甲), 곰배정(丁) 등의 집안 낙인이 있었으며 마을 공동낙인으로 어도(한글 어도를 위아래로 배치함)자의 낙인을 사용했다.
낙인 사용에 있어서 낙인 주인의 경우는 우마 오른쪽 엉덩이에 찍었고, 낙인이 없어 남의 것을 빌려 찍는 경우는 왼쪽엉덩이에 찍어 우마의 주인이 다름을 구분했다. 낙인을 찍고 나서 상처가 덧나지 않게 참기름을 발라주기도 했다. ※제보자=양두행 (78)·강규방(75)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