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 노리는 재선충…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주 생명숲 곶자왈 연대기] 9. 재선충과 곶자왈
굴삭기 사용 등 방제작업 과정 생태계 파괴도 발생
피해지새 새명 태어나…소나무·곶자왈 상생 시급
▲피할수 없는 재선충 피해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경험하지 못한 신(神), 죽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처럼 무지에서 두려움은 온다. 공룡이나 매머드처럼 정작 힘세고 무섭다는 동물들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멸종위기에 있는 이 땅 생태계에서 정작 우리를 위협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작고 힘없는 생명체는 무리를 이루고 생존하는 법이다. 한 때는 에이즈가 곧 죽음을 의미하듯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더니 자연계에 있어 재선충은 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며 소나무에게 죽음을 부르고 있다. 그야말로 1㎜도 채 안 되는 '버러지 충(蟲)'에 불과한 재선충이지만 암수 한 쌍이 20일만에 20만마리로 번식하며 한번 감염된 소나무를 어김없이 죽게 만들어 버린다.
재선충은 원산지인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일본을 거쳐 1988년 부산 금정산에 들어 왔다니 유입 경로부터 괜스레 무슨 침략이나 받은 것처럼 씁쓸하다.
그 작은 벌레 때문에 제주는 지난해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몇 해 전부터 조금씩 발견되던 재선충이 지난 여름 가뭄과 겹치며 급속히 확산되더니 단풍든 듯 붉게 말라죽은 소나무가 섬을 뒤덮었다.
제주도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4월까지 8개월간 고사목 제거 작업에 나섰는데 잘려나간 소나무가 무려 54만5000그루에 이른다. 사업비 447억원에 연인원 11만명, 장비 2만7000대 가 들어갔으며 작업중 3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니 작은 벌레가 부른 참사라 하겠다.
생태계 보고라는 곶자왈도 재선충을 피해가지 못했다.
선흘곶과 무릉곶 등 동서부 곶자왈 지역 소나무들도 재선충에 감염된 뒤 붉게 말라죽었다. 소나무만이 아니라 방재작업을 하면서 곶자왈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길이 나고 동백나무며 종가시나무, 백서향, 꾸지뽕나무 등 나무와 풀들이 찢겨지고 파이며 홍역을 치렀다.
소나무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곶자왈은 1960년대 숯과 목재 이용 등으로 베어진 뒤 수 십 년 만에 또다시 생태계 파괴라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곶자왈속 한적하던 오솔길을 떠올리며 찾은 대정읍 무릉곶자왈은 소나무 고사목 제거작업을 하며 굴삭기로 이 곳 저 곳을 파헤치고 뚫어놓아 옛 길을 찾기조차 힘들다.
환경부가 지정한 습지보호구역인 선흘곶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종가시나무와 구실잣밤나무, 동백나무 등이 우거진 상록수림이 소나무를 제거하기위해 공사장비가 들어가면서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길이 뚫렸다.
소나무를 자르고 밖으로 실어내 처리해야하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효율성이나 또 다른 생태계 파괴문제를 볼 때 어쩔 수 없는 일로만 보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재선충이 발생하지도 30년이 가까운데 아직까지 피해 고사목 제거나 여전히 많은 생태계 파괴논란을 부르는 항공방제가 대표적 방제방법이라니 우리는 늘 자연앞에 들이밀었던 과학이라는 무기가 얼마나 초라했는지를 다시 한 번 느낀다.
▲악재 속 움트는 생명
재선충 방제로 곶자왈속 나무들이 베어진 지 새봄과 여름을 맞았다.
무릉곶과 선흘곶 곳곳은 여전히 곶자왈용암류들이 깨진 채 널려있으며 베어지거나 파헤쳐진 채 널브러진 나무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상흔이 치유되기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그래도 희망을 찾는다면 포기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의지다.
밑동까지 베어지고 짓이겨진 나무들이 여리고 가녀린 잎들을 떨리듯 키워내고 있다. 오래전 베어지고 자라고를 거듭하며 그렇게 모질게 생명을 키워냈던 곶자왈 모습 그대로다.
종가시나무 사스레피나무 예덕나무 조록나무 팽나무처럼 맹아력이 뛰어난 나무들이 파괴된 숲에서 먼저 생명을 키우는 주인공들이다.
맹아력이 뛰어난 수종들이기에 다시 싹이 자랄 거라고는 기대하기 힘든 조건에서도 한 가닥 줄기라도 내놓는 모습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세월호속 아이들이 그러했을텐데…. 생명이 주는 무게감에 가슴이 먹먹하다.
숲 사이로 잘린 지 얼마되지 않은 나무도 보인다. 요즘 약재로 유명세를 치른다는 황칠나무다.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며칠 전 밤사이 누군가 차까지 몰고 와서 나무를 잘라갔다고 한다. 관리인이 있고 습지보호구역이자 문화재 지역인 동백동산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라니 다른 곶자왈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재선충도, 세월호도, 곶자왈속 나무들이 겪는 수난도 결국은 사람 탓인지라 괜스레 미안하고 화도 난다.
제주도가 지난 5월 8일 '소나무 재선충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선언했다. 목표만큼 고사목을 제거했고 매개충이 고사목에서 나온 5월 이후는 고사목제거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른바 승전에 따른 휴전 선언이지만 아직 승전인지를 단정하기는 이르다. 재선충이 전쟁 한번으로 제압할 수 있는 간단한 놈들이 아닌데다 지난 전쟁이 완벽한 작전과 전투 아래 치러지지는 않은 듯하다.
지금도 도내 곳곳에서 고사한 소나무들이 확인되고 있다. 동백동산 내부에서도 고사목을 제거한 현장 근처에 버젓이 말라죽은 소나무가 남아있으며 2㎝이하 가지까지 말끔히 제거했다 하는데도 굵은 가지들이 여럿 남아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여름을 보내면서 소나무 고사는 다시 늘 것이며 2차 전쟁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소나무도 살리고 곶자왈도 살리는 뛰어난 전략이 나오기를 또다시 위기를 맞은 곶자왈속 숱한 생명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특별취재팀=김영헌 편집부 차장, 고경호 사회부기자 ▲외부전문가=김효철 (사)곶자왈사람들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