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 막아주는 오름·마을 힘으로 천혜목장 일궈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7.상가리공동목장①

2014-08-18     김봉철 기자

▲ 상가리공동목장은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바리메오름입구에서 볼 수 있다. 김봉철 기자
방앳불 놓기·초지개량 등 목장 관리 규정 엄격
보양식·설사약 등 다양한 전통 연구가치 충분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쭉 올라가다보면 바리메오름 입구에서 상가리공동목장을 만날 수 있다. 입구를 따라 오르면 목장길 좌우로 바리메오름과 족은바리메오름을 병풍처럼 두른 목장에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중산간 풍경이 펼쳐진다. 질 좋은 풀을 자랑하는 상가리공동목장에서는 특히 목축과 관련한 풍습과 규약, 민간요법 등이 많이 남아 있어 연구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질좋은 초지 이웃마을에도 인기

상가리공동목장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말 속칭 '엄복이' 일대와 그 주변 '작지흘', '번대왓' 일대 등으로 알려진 곳이다.

당시 마을 주민들이 소와 말을 방목하면서 몇명이 돌아가면서 우마를 돌봤지만 본격적으로 목장조합이 등장한 것은 1910년 중반 측량작업이 이뤄지고 난 후였다.

전 상가리장인 김재문씨(84·애상로 258-4)에 따르면 특히 상가리공동목장은 초지개량으로 질 좋은 풀이 많았고, 큰바리매와 족은바리매가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곳이어서 인근마을인 소길리, 납읍리, 장전리, 신엄리, 구엄리, 중엄리의 소들도 이 목장에서 방목됐다. 이 경우 공동목장 방목료로 소 1마리당 보리쌀 4말 정도를 조합에 납부해야 했다.

지대가 높아 소를 괴롭히는 진드기 등 병해충이 꼬이지 않는 점도 상가 공동목장의 자랑거리였다.

해발 550m 부근의 공동목장 내 어음천에는 물이 고이는 소(沼)가 있으며, 이곳을 마을주민들은 '오리수물'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1915년(대정4년)에 마을 주민들의 출역으로 시멘트를 이용해 만든 하천 물을 가두는 시설이 현재도 남아있으며, 이곳의 물은 우마급수용으로 이용됐다.

공동목장 내에서도 소들의 방목지는 서로 달랐다. 베록새왓 목장은 '암소통', 엄복이와 번대왓 목장은 '숫소통'이었다. 암소와 숫소를 분리해 방목하는 것은 제주도 전체 공동목장의 공통된 방목방식이었다.

목장 내에는 관리사 2동이 있다. 현재 쓰이지 않는 옛 관리사는 마을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지만 새로운 관리사는 애월읍의 지원을 받아 만든 것이다.

목장 '공동관리' 엄격한 편

공동목장에 일이 있을 경우, 집집마다 한 사람씩 노동력을 제공하는 출역이 이뤄졌다. 특히 출역과 관련한 규약은 엄격한 편이었다.

이른 봄철 방화선을 구축해 실시했던 방앳불 놓기, 늦봄 고사리 캐기와 가시덤불 제거를 할 때 출역이 마을공동체 행사로 이뤄졌다. 불가피하게 출역에 불참할 경우, 조합규약에 근거해 조합원명부에서 불참자를 제명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이웃사람을 빌려 대신 참여하게 했다.

양력 6월 중순이면 여름작물 파종이 끝나 공동목장에 소를 올렸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여름방목'을 했으며, 이 기간에는 고용된 목감이 방목우마들을 관리했다. 방목기간 동에 보수로 목감은 공동목장에 소를 올린 사람들에게 소 1마리당 보리쌀 2말을 받았다.

김재문씨의 기억에 의하면 똑똑한 소들은 그냥 풀어놓아도 상산까지 올라가 풀을 뜯으며 살다가 겨울이 다가오면 알아서 주인집 올레 입구까지 내려왔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대부분 마을 어귀까지는 돌아왔다고 한다.

이 공동목장에 소가 가장 많이 방목됐을 때는 700~800두 정도 있었다. 가을 농작물 수확과 운반을 위해 주민들은 소들을 공동목장에서 마을로 이동시키나 비농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소들은 10월부터 다시 '가을방목'을 했다. 이 경우는 목감을 고용하지 않고, 소를 올린 사람들끼리 순번을 정해 소를 관리했다.

현재 마을에는 소 2농가, 말 10농가가 목축을 이어가고 있으며, 공동목장을 이용하는 마소는 130두 가량이다.

다양한 민간요법 남아

소를 잘 키운다는 것은 크고 살찌게 해 다른 소보다 값을 더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든 집에서는 소를 살찌게 키우기 위해 특별한 보양식을 만들어 먹였는데, 닭을 푹 삶아 뼈를 추려내고 살과 국물을 먹이는가 하면, 특별한 보양식으로 오메기술을 담아 익으면 계란과 참기름을 넣어 잘 섞은 후에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보양식은 콩을 갈아다 날콩가루를 물에 타서 먹이는 방법이 있었다.

우마 질병 치료의 민간요법에는, 소는 과식을 하면 설사를 하는데 소가 설사를 할 때는 쑥이나 익모초 달인 물을 먹였다. 하지만 콩밭에 들어가 콩을 많이 먹어 설사할 때는 숯가루를 물에 타서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의 설사에 가장 좋은 약으로는 양귀비 줄기 달인 물이었다. 열매를 따고 난 후 줄기를 삶아 그 물을 보관해 두었다가 소가 설사를 할 때면 물에 타서 먹였는데 이 약을 먹이면 바로 나았다고 한다. 이 약은 소의 발굽 사이에 고름이 생기는 '창'에도 발라주었다. 과거 양귀비의 재배가 불법이 아니었으므로 마을에서 몇몇 집에서는 비상약으로 양귀비를 재배했고 마을 사람들은 필요하면 쉽게 구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송아지나 망아지는 장마철이 되면 피부에 버즘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는 콥데산이(마늘)을 찧어 발라주거나 인두를 불에 뜨겁게 해 버즘이 있는 부위를 지져 주었는데 그렇게 하면 버즘균이 죽는다고 한다.

또 민간에서는 말의 기름을 화상 치료의 가장 좋은 약으로 여기고 있었다. 화상에 말기름을 바르면 통증이 없어지고 피부조직이 재생되는 효과가 있어 지금도 집집마다 비상약으로 준비해 두고 있다. 김봉철 기자

적바림 /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상가리 마을은 강씨·양씨·변씨의 집성촌으로 소와 말을 많이 길렀던 마을이기도 하다.

목축을 위주로 했던 이 마을에서는 집안별로 서로 다른 낙인을 사용했는데, 양씨 집안에서는 상가(上加)를 위아래로 배치한 낙인을 사용했고, 변씨 집안에서는 점(占)자 낙인을, 양씨 집안에서는 상(上)자 낙인을 사용했다.

양종한씨에 따르면 양씨 집안에서는 상가(上加, 글자가 위아래로 배치돼 있음)낙인을 공동으로 사용했는데, 큰 할아버지 댁에서는 말의 오른쪽 엉덩이에 낙인을 찍고 오른쪽 귀를 1자로 조금 찢어 귀표를 했고, 샛할아버지 댁에서는 오른쪽 엉덩이에 낙인을 찍고 오른쪽 귀 끝을 둥글게 잘라 표시했다. 말젯할아버지(샛째 할아버지) 댁에서는 왼쪽 엉덩이에 낙인을 하고 귀표도 왼쪽 귀끝을 1자로 잘라 표시했다고 한다.

낙인을 하다보면 첫 번째 낙인이 희미해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상처가 덧날까봐 염려가 되어 두 번째 찍고 난 후에 소주를 발라주기도 했다.

지금은 우마에게 낙인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목부위에 칩을 박아 이 칩 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과거 이 마을에서 사용했던 낙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마을의 강종한씨(51)는 옛 낙인의 모양을 따라 본인이 직접 '상(上)'자의 낙인을 만들고 자신의 애마인 '얼룩공주'에게 낙인을 직접 찍었다고 한다.

강씨의 목장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낙인과 오른쪽 엉덩이에 그 낙인이 찍힌 말을 볼 수 있었다. 낙인의 전통문화와 지식이 끊기는 듯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한사람의 호기심과 노력으로 오랜 전통이 다시 이어져가고 있음을 볼 수 있어 흐믓했다.


 

적바림 / 강만익 문학박사

상가리 공동목장은 해발 600m 일대의 족은바리매 남쪽 '베록새왓'(산121), 큰바리매 남쪽 '엄복이'(산111), 해발 500m 산록도로 부근 '번대왓'으로 이뤄지고 있다. 족은바리메와 베록새왓 경계를 따라 목장경계용 돌담이 남아있으며, 이 돌담을 따라 삼나무가 심어져 있다. 족은바리메에서 발원하는 어음천이 베록새왓 목장을 통과해 해안으로 연결되고 있다.

상가리 공동목장조합은 '공동목장지이용상황조사에 관한건'이라는 문서에 따르면, 1935년(소화10년) 6월 1일 제주도사(濟州島司)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당시 조합원은 모두 156명으로, 조합원들은 모두 상가리 주민들이었다.

동목장이용상황조사표(1943)는 이 조합의 목장용지가 매수지와 기부지, 차수지로 구성됐음을 보여준다. 매수지는 산15, 산16번지 임야와 주민들이 공동목장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농사짓던 약간의 밭 등 하가리와 상가리 주민 15명으로부터 매입한 땅이었다.

상가리에는 리유림(里有林)이 존재했으며, 이 중 산 19번지 리유림(里有林)은 기부지, 산 112번지 리유림(里有林)은 차수지였다. 리유림은 70여년 동안 공동목장지로 이용되면서 초지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