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목축문화 공존하는 '해안마을'의 목장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9. 하도리공동목장 ①
마을공동목장조합 외에 축산계 별도 조직 운영
백중제·쉐접 등 현재까지 독특한 문화 전해져
교래리를 지나 손자봉 인근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오른쪽 작은 길로 들어서면 하도리공동목장 입구와 만날 수 있다. 높은오름과 동거문오름, 문석이오름, 손자봉 사이의 평탄한 지형에 가까이 돛오름,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이 주위로 펼쳐져 있어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목장이다.
해안마을이 개척한 공동목장
보통의 마을공동목장들의 소유주체가 중산간마을인데 반해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면서 목축문화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마을과의 거리도 제법 먼 편인데 어떻게 이곳에 목장을 만들게 됐을까.
이유는 하도리의 '땅'이었다. 모래가 섞인 척박한 토질 때문에 농사가 잘 안되는 지역이라 1970년대 당시 짭잘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목축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김성은 하도리축산계장에 따르면 당시 송아지 한마리 가격이 150만~200만원으로 쇠장시에게 소를 팔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목장에서 키우던 소들은 당근·조·보리·메밀·밭벼 등이 주를 이뤘던 농사에도 도움을 줬다. 인접한 해안마을에 비해 농경지가 넓어 밭갈이용으로 많은 우마들이 필요했다. 밭을 가는 것은 물론 부산물인 퇴비로 땅의 기운을 돋울 수 있어 일석삼조의 효과였다.
화산회토로 이뤄진 밭에는 자갈이 많지 않다보니 '밭갈쇠'라 불렀던 숫소에 의지하지 않고 말로도 충분해 '말테우리'가 많았던 것도 이 지역의 특징이다. 제주의 '마지막 말테우리'라 불리는 고태오 할아버지가 4대째 목축업을 이어온 무대도 바로 이곳이다.
여자들은 물질을, 남자들은 목축을 맡으며 집집마다 마소를 키워 한때 250농가를 넘었지만 현재는 15농가, 300여마리만 남아있다.
1975년부터 조합-축산계 이원화
농사철을 제외한 기간에는 우마를 초지에 방목해야 했기 때문에 마을공동목장 확보는 마을주민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이런 염원에 따라 1910년대 토지사정 당시 이 마을 출신 구좌면장과 면서기에 의해 구좌읍 송당리 높은오름이 하도리 마을 리유지로 사정돼(하도향토지, 2006) 공동목장으로 활용했다는 주장이 있어 흥미를 끈다.
1976년에 구좌면장이 북제군수에게 발송한 '리공동목장산지조림계획' 문서에도 이 마을에서 1919년에 높은오름(高岳, 해발 405.3m) 일대를 공동목장으로 이용했음을 뒷받침해 준다.
하도리는 기존 마을공동목장조합 외에 축산계가 따로 조직되면서 다른 공동목장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이는 1975년 하도리 축산계가 출범하면서 공동목장조직이 이원화됐기 때문이다.
현재 하도리에는 마을소유 높은오름 공동목장을 관리하는 하도리공동목장조합과 동거문오름과 손자봉을 연결하는 공동목장을 운영하는 하도리축산계가 있다.
이에 따라 명칭도 각각 달라졌다. 마을 소유 목장은 조합과 목장을 관리하는 이들을 각각 '조합장' '목감'으로 부르지만 축산계 소유 목장은 '축산계장' '목장장'으로 불린다.
마을소유 목장이 20만여평, 축산계 소유는 25만4000여평으로 비슷한 규모지만 현재 마을 소유 목장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하도리 공동목장에서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목축문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우마의 번성을 비는 '백중제'의 경우 보통 소를 올릴 때 관리사 앞에서 진행되는 것과 달리 하도리목장에서는 초지에 나가 백중제를 지내며, 이같은 목축의례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공동방목하는 소를 두고 '에움쉐' 또는 '번쉐'라 불렀고, 방목계절은 주로 4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이었다.
하도리 민속지에 따르면 여름농사를 끝낸 소서부터 추분 무렵 목초를 수확하기 전까지 소의 주인들이 각각 마을공동목장에 삯을 주고 위탁방목했으며, 이때 소를 두고 '삯쉐'라고 불렀다.
가을의 소 방목지는 '촐왓'에서 주로 먹였고, 목초수확이 끝난 촐왓에서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소를 들여놓을 수 있었다. 또 마을마다 '쉐접'이나 '에움접'으로 불린 공동방목을 위한 조직도 구축돼 있었다.
하루에 두 사람이 70두 안팎의 소를 돌아가며 돌보고 밤에는 '에움'에 가뒀다. 한 집에서 한 마리 이상의 소를 방목할 경우 돈을 받아 이렇게 모은 돈으로 에움 임대료를 마련했다.
한편 진드기 구제가 15일마다 이뤄지는 점을 감안해 목장을 4곳으로 나눠 윤환방목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이 마을 공동목장조합은 설립당시 높은오름과 동거문오름 일대의 자연초지를 마을공동목장으로 확보했으며, 1938년(소화13년) 5월 22일에 제주도사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3년 당시 조합원은 242명이었으며, 목장용지는 매수지(25필지), 기부지(22필지), 차수지(2필지)로 구성됐다. 산 73번지 등 매수지는 인접마을인 송당리, 종달리 주민(12명)들이 소유했던 토지로, 이들은 하도리 목장예정지에서 개간을 통해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었다.
기부지는 이 마을 주민 고만길 외 19명이 소유했던 밭과 임야 등이었다. 마을소유의 리유지도 목장조합에 기부됐다. 이것은 높은오름(高岳)에 해당하는 산 213번지 임야 74정보였다. 차수지는 종달리 산70번지와 송당리 산19번지 구좌면 면유지였으며, 종달리 산70번지(48정보)는 동거문오름에 해당한다. 이 공동목장 내에 위치한 높은오름과 동거문오름은 바람을 막아주거나 여름철 더위에 지친 소들의 방목지로 활용됐다. 천혜의 '미나리못'과 '중이굴'이라는 숲도 우마방목에 도움을 주고 있다.
1970년대 마을공동목장 일부 토지에 대한 분쟁을 거친 후 1975년에 하도리 축산계가 출범하면서 공동목장조직이 이원화됐다. 마을소유의 높은오름 공동목장에는 구좌읍공설묘지가 조성돼 있으며 축우가 방목되지 못하고 있다. 축산계가 운영하는 동거문오름과 손자봉 일대의 초지에는 목장장을 7개월간 고용하며 현재도 축우들이 방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