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목축 문화 숨쉬는 현대식 공동목장
[제주의공동목장사] 9. 하도리공동목장 ②
목축 의례인 '백중제' 주민참여로 펼쳐져
목책·관리사·약욕장 시설을 갖추고 부활
해녀물질부터 농사, 축산까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구좌읍 하도리는 그만큼 세시풍속에 대한 기록과 자료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이중 축산에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하도리 공동목장의 역사도 알 수 있다.
상산 대신 '방돈' 기록 남아
하도리의 산야는 농경지를 만들 수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었지만 내버린 땅은 아니었다. 산야에서 방목과 땔감, 촐·새 수확 등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소를 기르는 것은 농사에 큰 도움을 줬다. 암소는 비교적 쉬운 숙전을 가는 일을 맡았고, 숫소에게는 거친 '새왓'을 이기는 일에 부렸다. 송아지를 키워 팔면 수입도 좋아 거의 대부분의 집에서 소를 길렀다.
중산간 마을에서 한라산과 가까운 '상산'에 소를 올려 방목했다면 해안 마을인 하도리에서는 '방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방돈은 '새왓'과 '촐왓'을 개간해 특용작물을 키우기 전인 1980년 이전, 일정한 기간에 일정구역에서 소를 산야에 풀어놓아 기르는 것을 말한다. 주민들은 이를 '방돈'이라 불렀지만 정확하게는 '방둔'(放屯)에서 비롯된 말로 여겨진다. 이는 농가별로 개별적으로 진행됐다.
봄풀이 움트는 청명부터 여름농사를 준비하는 하지까지 이뤄진 방둔을 '봄방둔', 추수를 끝낸 소설부터 서리가 내리는 동지까지는 '고(아래아)실방둔'(가을방둔)이라 했다.
주민들은 소를 풀어놓는 곳을 '살시'라 불렀으며, 위치는 용눈이오름과 손자오름, 동거문오름 등이었다.
서리가 내리면 소는 스스로 집을 찾아 돌아왔지만 가끔씩 소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사고를 막기 위해 소가 2살 될 무렵부터 낙인을 찍었지만 숲속으로 숨거나 죽어서 발견되기도 했다. 낙인은 '又'(우), '丁'(정), '巾'(건) 등 여느 마을처럼 문중에 따라 간단한 글자를 사용했다.
하지만 소의 월동사료인 촐과 방목비용, 노동력을 아낄 수 있고, 또 겨울 이전 방목을 통해 비육시키는 데도 도움이 됐기 때문에 방둔을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소 주인들은 10여일에 한번씩 소를 찾아보거나 이웃에 안부 확인을 부탁하는 등 노심초사해야 했다.
백중제 등 세시풍속도 다양
제주특별자치도와 국립민속박물관이 지난 2007년 발간한 「하도리 민속지」에는 특히 세시풍속과 관련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민속지에 따르면 백중제(테우리 코사)는 7월14일 밤 자시를 기해 올린다.
제물은 소를 위한 메 1그릇과 산신을 위한 메 1그릇, 제숙(구운 생선), 나물, 술(감주) 등을 올렸고 이밖에 수탉을 준비하는데, 여의치 않으면 달걀 3~4개 정도로 대체하기도 했다.
목장장과 수의사 등이 참여하며, 각자 제물을 차려서 간다. 하도리 공동목장 밖에 계원들이 모여 백중제를 준비하지만 백중제는 목장 안에서 진행된다. 진설할 때 신위를 모시는 방향은 해마다 생기를 봐서 동서남북중 막히지 않은 쪽으로 정했다.
백중제는 축문을 읽으며 전체적으로 간단한 유교식 제의의 형태로 진행됐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목장장(목감)이 절을 1번 한 뒤 잔에 술을 따라 향 위에서 한 번 돌리고 절을 2번 하고, 나머지 2개의 잔에 술을 따르고 절을 다시 2번 한다.
이어 잔에 제사음식을 조금씩 떼어 놓고 다시 절을 2번, 임대 대리인이 절을 2번하고 다시 반절을 한다. 마지막으로 목장장이 그해 생기가 막히지 않은 쪽을 찾아 삽으로 흙을 한 번 살짝 뜬 뒤 생닭머리와 북어 머리를 잘라 잔에 넣은 음식들과 함께 묻고 흙을로 덮어 밟아준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현재는 말이나 소를 키우지 않는다고 해도 예전부터 하던 일이기 때문에 백중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서로 어울려서 신동 동산에서 술마시며 논다고 한다.
특히 백중에 목욕하면 종기가 없어진다고 해서 밤에 바닷물에 쳤고, 목동들은 우마제를 지냈다는 구술자료도 남아있다.
소들은 하도리 공동목장에 방목하는 7개월과 방둔시기를 빼면 집안 외양간인 '쉐막'에서 겨울을 넘겨야 했다.
이때 필요한 '촐'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암소 한 마리가 겨울을 나는데 필요한 풀은 30바리(한 바리는 30단)로, 이를 구하려면 2640㎡(800평) 정도의 촐왓이 필요했다. 여기에 숫소는 50바리나 필요했다.
하도리에서는 망종 이전과 촐 수확이 끝나는 추분 이후 주민들에게 자유롭게 촐왓을 방목지로 개방해 부담을 덜었다. 촐왓의 주인은 이웃들의 방목에 한해 촐왓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동거문오름 취수문제 해결
목장내에서도 하도리의 목장사를 알 수 있는 목축문화재들이 남아있었다.
먼저 목장 입구 왼쪽의 '목장부활기념비'에는 1975년 5월 축산계 조직과 기존 공동목장에서 현대식 목장으로 재탄생하기까지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1977년 세워진 비에는 당시 축산계원들이 물심양면 노력해 목야지 5만908평을 확보하고 목책시설, 관리사, 약욕장 등을 건설해 목장을 활성화 시킴으로써 목장을 부활시킨 당시 임원들의 노고를 칭송하는 글귀가 적혀있다.
목장부활기념비에 적힌 임원은 고기주 축산계장과 오은표·고삼남 고문, 오달인 개발위원장, 송수원 감사, 이방신 상임이사 등이다.
목장중심부의 관리사 옆에는 옛 축사가 남아있다. 이는 집에 쉐막이 없는 계원을 배려해서 만든 것이지만 축산농가가 급감하면서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동거문오름 자락에 위치한 물 저장고에서는 물이 나지 않는 약점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 오롯히 담겨있다.
1970년대 대규모 지어진 저장고에는 10월까지 물이 만수위에 가깝게 차 있었으며, 오래된 시설이지만 이곳 목장에 수도시설이 마련되지 못한 관계로 지금까지 급수관을 통해 목장 곳곳의 급수장과 연결돼 소들의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