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식물의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
[제주 생명숲 곶자왈 연대기] 13. 곶자왈 식물생활사
2014-10-22 김영헌·고경호기자
동백동산·금산공원 등 태양에너지로 식물 생육
적당한 습도·온도…발아·생장 활동에 중요 요소
빙하기·온난화 등 기후변화 속 생명 적응해나가
다시 봄 맞을 준비에 분주
어느덧 빛이 그립고 아쉬운 계절이 찾아왔다.
여름내 넘치는 햇빛을 받으며 왕성한 생육활동을 하던 곶자왈속 식물들은 짧아진 가을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위해 아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상쾌한 바람에 나뭇잎이 한들거리는 평화로운 가을 숲이지만 식물들로서는 다가올 겨울을 견디고 또다시 봄을 맞아 잎을 키우기 위한 준비에 한 치도 게으를 수 없는 날들이다.
곶자왈속 생명을 키우는 것은 빛이다. 빛은 곶자왈속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같은 존재이자 때로는 엄격하고 냉혹한 지배자가 되어 숲속 생명을 배척하고 도태시킨다.
조천읍 동백동산이나 애월읍 금산공원, 대정읍 무릉곶자왈처럼 나무가 우거진 숲을 찾으면 빛이 숲을 어떻게 통제하고 숲속 식물들은 빛이 허용한 공간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볼 수 있다.
온통 나무들로 뒤덮인 숲을 눈여겨보면 종가시나무와 구실잣밤나무, 녹나무, 생달나무, 참가시나무와 같이 키 큰 나무들은 너나없이 웃자라듯 햇빛이 닿는 높이에 이르러서야 일제히 가지와 잎을 내고 있다.
숲 사이로 경쟁에서 도태된 산유자나무와 동백나무가 죽거나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겨우 살아가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나무들끼리 태양에너지를 얻기 위한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렇다고 곶자왈은 키 큰 나무들만 빛을 독차지하고 살아가는 강자독식 세상이 아니다.
가을빛이 나뭇잎에 반사되며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모습은 아름답고 정갈하다. 하지만 살랑거리는 짧은 순간에도 빛은 종가시나무 가지 사이를 뚫고 지상으로 내려와 키 작은 나무와 고사리 군락에도 빛을 나눈다.
나무사이로 내려오는 약한 빛에도 충분히 양분을 얻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응한 나무와 풀들은 우거진 숲 아래를 자생지로 살아간다.
산양곶자왈 함몰지를 가득 메운 밤일엽과 교래곶자왈 용암이 만들어낸 요철지형 바닥을 따라 녹색물결을 이룬 일색고사리, 무릉과 신평곶자왈을 비롯해 종가시나무 아래 무성하게 자라는 가는쇠고사리 군락은 빛이 만든 적응과 도태 결과다.
빛이 곶자왈속 식물을 지배하고 에너지를 준다면 습도와 온도는 식물이 발아와 성장, 여름과 겨울나기에 중요한 요소다.
곶자왈마다 펼쳐진 함몰지와 요철지형, 숨골, 튜물러스, 용암돔, 궤는 습도와 온도를 유지시키는 조절장치와 같다.
이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은 분화구에서 흐르던 용암류가 차가운 공기를 만나 식은 후 다시 용암가스나 용암류 압력, 중력 등으로 무너져 내린 함몰지다. 규모가 큰 것은 깊이가 수십m도 넘는 함몰구는 여름과 겨울 온도가 거의 일정한 항온기능을 한다.
국립산림과학원이 조천읍 검은오름 곶자왈 함몰지를 조사한 결과 한여름인 6∼8월 함몰구 지표면은 23.1도였지만 함몰구 바닥은 8.4도로 제주시 겨울 평균기온 6.7℃와 비슷했다.
온도와 함께 곶자왈 암반 밑은 빗물이 스며들어가 거대한 습지를 이루는 곳으로 사시사철 높은 습도를 유지한다.
여름과 겨울 경계를 무너뜨리는 곶자왈속 온도와 습도는 빌레나무, 생달나무, 식나무, 붓순나무, 큰섬잔고사리, 가는쇠고사리와 같은 남방계 아열대 식물과 한들고사리, 좀나도히초미, 좀고사리, 골고사리 따위인 북방계 식물을 함께 키우는 생태계 보고로 만든다.
북방·남방계 식물 공존 유일
곶자왈에 관심이 있다면 '곶자왈은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한 곳'이란 자랑 섞인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제주처럼 용암지대가 펼쳐진 곳이 여러 곳도 있고 기후에 따라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곳 또한 있으니 세계유일이란 표현은 곶자왈을 내세우고 싶은 과장된 표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유일이냐 아니냐를 떠나 수만년 곶자왈에서 삶을 이어온 식물사를 안다면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생명력이 새삼 대단할 뿐이다.
1만년쯤 빙하기 막바지 제주도 해안가까지 점령하던 북방계 한대식물들은 갑작스런 기후 온난화로 한라산 높은 곳으로 쫓겨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거나 곶자왈 한 곳을 피난처 삼아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해온다.
오랜 기후변화 과정에서 곶자왈은 오래전 빙하기때 제주에 살던 북방계식물들이 뜨거운 여름을 견딜 수 있는 곳이자 제주가 따뜻해지면서 서서히 삶을 넓히던 아열대 식물들이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는 피난처이자 보금자리였다.
알맞은 온도와 습도와 달리 곶자왈속 나무들이 견뎌야할 것은 역시 흙을 보기 힘든 척박한 돌무더기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돌 위를 따라 뱀이 바위틈에 스며들듯 꿈틀대며 뿌리내린 나무는 불리한 환경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보여준다.
양분을 얻고 몸을 지탱해줄 흙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무는 돌 틈을 따라 뿌리를 내린다. 그런 뿌리는 간혹 마치 나무판자를 세워놓은 것 같아 판근이라 불린다. 판근(板根)은 뜻 그대로 판자처럼 생긴 뿌리로 암반을 뚫지 못한 나무가 틈 사이로 자라는데 양분을 받은 뿌리는 위쪽으로 더 많이 자라게 되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지탱하려는 힘까지 모아지며 어떤 뿌리는 높이가 수십 센티미터에 이를 정도로 얇고 높게 자란다.
뿌리가 변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꾸지뽕나무처럼 강한 가시와 줄기를 가진 나무가 곶자왈속에서 키 큰 나무 사이 자라다 보니 줄기가 어느새 덩굴처럼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자연에 기대어 살지만 생명에 대한 본능과 의지는 자연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고 곶자왈을 신비와 경이로운 생태계로 살아남게 한다. ▲특별취재팀=김영헌 편집부차장, 고경호 사회부 기자 ▲외부전문가=김효철 (사)곶자왈사람들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