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가장 따뜻한 감귤 주산지 명성
[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18. 효돈동
18세기 중후반 쉐둔(牛屯)→효돈(孝頓·孝敦)으로 바꿔
한라산 남녘 바로 앞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효돈동은 감귤 주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을 끝자락에서도 효돈동은 따스한 햇볕을 쬐며 금빛 자태를 뽐내고 있는 감귤이 새콤달콤한 내음 코를 간지럽힌다. 겨울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마을로 유명하고 최근에는 효돈천의 자연생태가 알려지고 쇠소깍을 비롯해 해안절경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신효와 하효 2개 마을로 이루어진 효돈동은 대부분 1차 산업인 감귤에 종사하고 있고, 지역자원과 연계한 6차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효돈동은 일찍부터 '쉐둔·쉐돈'이라 불러왔고 한자차용표기로 '牛屯'을 표기해 곧 '쉐(소)'를 모아 두었던 곳이라는 데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효를 도탑게 하는 마을' 신효
신효마을은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약 3㎞에서부터 5㎞사이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는 큰내(효돈천)를 경계로 하례리와 접하고 동남쪽에는 하효동과 인접하여 경계를 이루며 특히 인가가 서로 마주 접하여 살아가고 있다.
서쪽으로는 서상효·토평동과 접하고 북으로는 동상효와 서상효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하효동과 보목동이 접하여 도내에서는 산간마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바다가 없는 몇 안 되는 마을 중에 하나다.
효돈중학교 동쪽과 북쪽의 효돈천 일대 유물산포지에서 탐라시대 전기(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의 곽지리식 적갈색 토기 등이 확인 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500여년 전부터 이 일대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효마을은 '알쉐둔마을'이라 하여 '하우둔촌'이라 했다. '하우둔촌은 18세기 중후반에 하효돈리와 중효돈리 등 2개 마을로 나뉘었다. 이때 지금 신효마을은 중효돈리라 했다.
18세기 중후반부터 쉐둔이라는 한자 표기를 효돈(孝頓 또는 孝敦)으로 바꾼 것은 '효를 도탑게 하는 마을'이라는 데서 새롭게 만든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의군 우면 하효리 일부와 신효리 일부를 병합해 제주군 우면 신효리라 했으며 현재 신효마을은 이 일대를 이른다.
왕에게 감귤 진공마을 하효
하효마을은 서귀포시로부터 동쪽으로 약 5㎞ 지점에 있는 동으로 효돈천을 경계로 남원읍과 접해 있고 북쪽과 서쪽은 신효동과 접해 있으며, 남쪽은 태평양과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한라산 바로 남쪽에 위치해 북풍을 막는데 최적지로 도내에서도 가장 따뜻하고 무풍지대이며 비옥한 토지, 수량이 풍부한 효돈천, 아름다운 해안 절경 등 사람이 살기 좋고 무한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지석묘의 유적이 이곳저곳에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서 금석병용시대로 들어갈 무렵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밭 가운데는 '대궐터', '당두왓', '절왓', '대선병디', '뒷가름', '옥터', '죽림이 있었던 곳', '전세포' 등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효돈천, 하례천, 공천포의 물을 찾아 큰 집단을 형성하고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효 마을의 지표 기복은 전체적으로 북쪽에서 남쪽 해안을 향해 완만하게 고도가 낮아지는 완사면 지형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안쪽에 오름 같은 높은 기복의 지형도 출현자지 않으므로 완만한 순상화산이나 용암대지의 지형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효 마을의 해안은 분화활동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화산해안이다
하효마을 484번지 일대는 조선시대의 과원이다. 조선시대 정의현에서는 여러 곳에 과원을 설치, 귤을 재배해 진공(進供)했다. 하효마을에도 18세기에 '서과원'을 설치해 관리했으며, 몇 십년 전만해도 재래종 귤나무인 산물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김지석 기자
쇠소깍
'쇠소깍'은 유네스코가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효돈천 끝지점에 위치한 깊은 소로서 '쇠'는 효돈을 나타내고, '깍'은 끝지점을 나타내는 제주어다.
이 쇠소에는 용이 살고 있다하여 '용소'라고도 전해 오는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릴 만큼 영험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쇠소깍'에는 애틋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하효마을에 어느 부잣집 귀여운 무남독녀와 그 집 머슴의 동갑내기 아들 두 처녀 총각이 신분상 서로의 사랑을 꽃피우지 못하자 비관한 총각은 쇠소깍 상류에 있는 '남내소'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를 뒤늦게 안 처녀는 남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 달라며 쇠소깍 기원바위에서 100일 동안 기도를 드렸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총각의 시신이 냇물에 떠내려오자 처녀는 시신을 부둥켜안아 울다가 기원바위로 올라가서 사랑하는 임을 따라 '쇠소'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후 하효마을에서는 주민들이 가련한 처녀총각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마을 동쪽에 있는 용지동산에 당을 마련해 영혼을 모시고 마을의 무사 안녕과 번영을 지켜주도록 기원을 드리게 되었는데 지금에는 '할망당' 또는 '여드레당'이라 불려지고 있다.
또한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먼저 '할망당'에 와서 용지부인석을 모셔다가 제단에 올려놓고 제를 지낼 만큼 효험이 높다.
이처럼 '쇠소깍'은 옛날부터 마을에서는 성소로 여길 만큼 신성한 곳이었으며 돌을 던지거나 고성방가를 하면 용이 노하여 갑자기 바람이 불고 일기가 나빠졌다고 전한다. 김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