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물영아리 오름 품은 목장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11.수망리공동목장①
문화유적·오름 활용한 체험 프로그램 가능성 주목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한 수망리공동목장은 람사르 등록 습지인 물영아리오름을 끼고 있는데다 상잣·중잣·하잣 등 잣성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앞으로 가치가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되는 높은 목장이다. 선조들의 목축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목장의 역사적·환경적 가치를 이용해 주민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옛 녹산장터에서 목축전통 이어와
수망리공동목장(조합장 현달평)은 역사적으로 조선중기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이 말을 키웠던 개인목장의 일부에 위치하고 있다. 김만일 목장은 1600년대 중반에 산마장(山馬場)으로 개편되고, 영조연간에는 녹산장·침장·상장으로 정비됐다. 수망리공동목장은 산마장 가운데 녹산장(鹿山場)에 해당되는 곳이다. 녹산장은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오름과 표선면 가시리 따라비오름과 큰사스미오름(대록산)을 연결하는 넓은 초지대에 위치했었다.
현재 물영아리 일대는 수망리공동목장, 따라비오름과 큰사스미오름 일대는 가시리 공동목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현재까지도 선조들의 목축전통이 계승되고 있는 현장이다.
수망리에서는 특히 1930년대 공동목장조합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수망원목축장축산회'가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축산회의 회칙은 제1조(명칭)부터 제21조까지 되어 있다. 1930년대 마을공동목장조합규칙이 일제에 의해 정해지기 이전에 제주목축민들이 스스로 제정한 규약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회칙 제정 동기에 나타낸 내용을 보면, 이 축산회에 가입한 7개 리 목축민들이 관행적으로 국축장내(國畜場內, 물영아리 오름 일대의 녹산장에 해당)를 이용해 목축을 행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던 중 일제에 의해 국·민유지를 구별하는 토지조사사업(세부측량)이 진행된 후, 1913년부터 목축민들이 물영아리오름 아래 사면 200여 정보를 제주도청에 대부출원했다.
그에 따라 목축민들은 대부허가를 받은 목축장예정지 경계를 따라 돌담을 쌓은 다음, 우마를 기르기 위한 절차를 밟은 결과 마침내 1925년에 이곳이 민유지로 확정되면서 1926년에 공식적으로 축산회가 조직된 것이었다.
잣성·물영아리 연계 체험 가능성 높아
수망리공동목장 내에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중잣성이 남아있다. 중잣성은 하잣성과 상잣성 사이에 위치한 돌담으로, 방목지를 양분하는 역할을 했다.
중잣성을 중심으로 초지대를 번갈아 가면서 목축했던 일종의 윤환방목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하잣성과 중잣성 사이에서 우마를 방목할 때 중잣성과 상잣성 사이의 방목지에 있는 초지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이 마을에는 하잣성과 상잣성도 존재하고 있다.
원래 하잣성과 상잣성은 조선시대 열개의 목장을 나타내는 십소장의 상하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마을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돌담이다.
그런데 수망리와 인접한 가시리 마을은 십소장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산마장(녹산장)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상·하·중잣성이 존재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국마장을 만들면서 이곳을 상·하로 구분하는 목장경계용 돌담을 연속해 쌓게 한 결과 수망리와 가시리에도 상·하·중잣성이 남아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중요한 역사유적이기 때문에 향토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현재 물영아리오름 아래에 위치한 수망리공동목장은 목초재배를 통해 사료를 확보하면서 소를 기르고 있다. 소값 하락으로 축산농가가 급감하고 있어 공동목장 운영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물영아리오름과 공동목장을 연계한 체험프로그램 개발을 제안한다.
물영아리오름은 환경부가 보호하고 있는 람사르등록 습지로, 전국에서 탐방객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 오름을 가기 위해서는 수망리공동목장을 통과해야 하므로 공동목장과 물영아리 오름을 활용한 체험프로그램 개발이 절실하다. 수망리공동목장을 활용한 고사리 축제 및 승마장 개설, 공동목장 내에 남아있는 중잣성 걷기, 테우리 생활사 체험관 건립 등의 프로그램은 공동목장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이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수망리에서는 소를 살찌게 키우기 위해 닭을 삶아 먹이는 경우는 없었는데, 소는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닭을 삶아 먹일 경우 천엽(소화기관)에 붙어 소화가 안돼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소의 보양식으로는 보리를 빻아서 죽을 쑤어 먹이거나, 콩을 물에 담가 두었다가 조금씩 먹였는데, 콩 역시 많이 먹으면 천엽에 이상이 생겨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는 소화가 안되면 소에게 위험했기 때문이다.
수망리에서는 소의 낙인을 음력 2월에 했다. 이 시기는 날씨가 추워 낙인으로 인한 흉터가 빨리 아물었고, 소가 외양간에 있어 눈과 비로 인해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낙인을 2월에 하지 않고 여름에 하는 경우는 낙인한 상처에 염증이 생겨 소가 고생할 뿐 아니라 낙인도 범벅이 돼서 알 수 없게 된다. 즉 글자 모양을 알 수 없게 된다.
낙인 글자는 박칩에서는 묏산(山)자를, 현칩에서는 새을(乙)자의 낙인을 사용했고, 그 외 곰배정(丁)자의 낙인이 있었다.
낙인을 빌려 쓰는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마을에서는 낙인의 글자를 돌려 찍었는데 이 마을에서는 글자는 바로 찍고 귀표를 달리해 주인이 다름을 구분했다.
소가 과식을 해 못견뎌하면 박하를 생으로 찧어 물에 타서 먹였다. 먹이는 양은 소주병 4홉들이 병으로 한 병 정도를 먹였다. 또 소가 설사를 하면 함벳낭(황벽나무)의 노란 샛껍질을 삶아 그 물을 4홉 정도 먹이면 나았다.
소에게는 발가락 사이에 염증이 생기는 질병이 많다. 소에게 이런 질병이 생기면 새끼를 꼬아 발가락 사이에 넣고 훑어내어 염증을 없앤 후에 소금을 발라줬다.
그 외에 소가 질병에 걸려 소화가 안되고 정신이 없으면 동네에 침 놓는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소침을 맞게 하면 나았다.
예전에 백중제는 개인별로 지냈다. 깨끗한 동산(백중동산)에 각자가 제물을 준비해 밤 12시에 지냈다. 백중제에는 남자만 참석하고 여자는 참석하지 않았고,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돌아왔다. 백중은 사람 이름이고 소를 돌보았던 목동이므로 소 주인은 백중제에서 절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백중제를 지내야 소가 아프지 않고 번성한다 해 백중제는 꼭 지냈다.
수망리공동목장조합은 「서기 1943년도 공동목장관계철」(제주도청 축정과)에 의하면, 1933년 5월20일에 설립인가를 받은 '기설목장조합'에 해당된다.
기설목장조합(1931~1933)은 시범적으로 설치된 초기 공동목장조합으로, 당시에는 22개의 기설목장조합이 존재했다(「일제시기 목장조합연구」, 2013).
1943년 당시 이 공동목장의 조합원수는 73명이었으며, 수망리 주민들로만 구성된 목장조합이었다. 이 조합은 남조로변 남원읍 충혼묘지 서쪽과 물영아리오름 남쪽의 리유지를 목장용지로 활용했으며, 부족한 목장용지는 남원면 소유의 면유지(산 180번지)를 임대하거나 토지를 매입해 충당했다.
특히 수망리공동목장조합에는 몇개의 귀중한 고문서가 남아있다. 1935년과 1936년에 작성된 토지매도증서와 1937년에 작성된 계약서 그리고 1926년에 작성된 「水靈員牧畜場畜産會名簿及會則」다. 토지매도증서는 공동목장조합에서 매입한 목장용지와 관련된 문서이다. 계약서는 자신의 임야를 공동목장지로 기부하여, 공동목장조합소유가 됨을 계약한다는 임야기부증서 문서다.
「水靈員牧畜場畜産會名簿及會則」는 1926년 정월에 작성된 문서로, 제주지역에 마을공동목장조합이 설치되기 이전에 주민들 자체적으로 축산조직을 만들어 목축을 행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로 평가된다. 당시 만들어진 조직의 명칭은 「水靈員牧畜場畜産會」(약칭 畜産會)이었다. 회원수는 77명으로 남원면 관내 수망리 38명·의귀리 7명·태흥리 4명·신흥리 11명·남원리 4명, 표선면 관내 토산리 10명·가시리 3명이 참여했다. 당시 남원면과 표선면의 7개리의 목축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점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