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부 삼성신화 탄생지이자 교통문화의 중심지

[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19. 이도동

2014-12-07     고경호 기자
▲ '이내' 라고 불리던 이도동은 중앙-남문-광양사거리를 잇는 교통문화의 중심지이자 제주성지와 오현단 등을 품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특히 삼성혈 숲은 도심 속 허파역할도 하고 있다. 제주칼호텔 옥상에서 바라본 이도동 전경. 고경호 기자
삼성혈·오현단·제주성지 등 위치 '유서 깊은 마을'
2010년 마을 미술 프로젝트 '독사천 흐르네' 진행
 
'이내'라고 불리던 이도동은 중앙-남문-광양로터리를 잇는 교통문화의 중심지이자 삼성혈, 제주성지, 오현단 등을 품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최근 이도2지구 개발로 대규모 주거단지가 조성됐으며 기존의 딸기, 파, 감귤 등 각종 농산물이 지속적으로 재배되면서 도·농 복합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고·양·부 삼성신화의 탄생지이자 제주시의 핵심부에 위치하면서 도시의 발생부터 성장에 이르기까지 모태가 된 이도동의 지명유래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 제주인의 마음의 고향 '모흥골'
 
이도1동의 대표적인 자연마을로는 '모흥골'이 있다.
 
'모흥골'은 '모흥혈' 즉 삼성혈 일대의 마을로 민간에서는 '멍굴'이라고 불렸다. 제주어 '멍궤'나 '멍굴'을 한자로 '모흥혈'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중기부터 '삼성혈(三姓穴)'이라 지칭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난 1964년 사적 제134호로 지정된 삼성혈은 제주인 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다. 제주의 시조인 고을라·양을라·부을라가 구멍에서 솟아난 곳이기 때문이다.
 
삼성혈이 성역화 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526년 제주목사 이수동이 고·양·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하면서라고 전해진다. 이후 3성의 후손들이 매년 4월10일 '춘제', 10월10일 '추제'를 지내고 있다.
 
삼성혈은 제주 전통양식의 건축물과 제사 등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제주의 탄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성소(聖所)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마을 소식지인 '행복마을 이도1동' 창간호에 따르면 오현단 북서쪽 일대의 마을인 '두목골', 관음사 포교당 남쪽 마을인 '생깃골', 오현단 서쪽 마을인 '항골' 등의 자연마을이 이도1동을 이루고 있다.
 
아홉형제 낳는 '구남골'
 
이도2동은 '과양' '연로' '구남골' '독짓굴' '돌로리'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민간에서 '과양'이라고 불렸던 '광양'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과 「탐라지」(1653년) 등에 표기돼있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넓은 땅'이라는 데서 이름 붙여졌는지 아니면 '과양'이라 불리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광양(廣壤)'이라고 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구남골'은 현재의 '구남동'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에 '구남동(九男洞)'으로 표기돼있으며, 민간에서도 '구남골' 혹은 '구남동'으로 불렸다.
 
마을 원로들에 따르면 예전에 한 풍수사가 이곳을 지나가 지형을 살펴본 후 "자식이 없는 사람이 이곳에 터를 잡아 살면 아홉 형제를 낳겠다"고 해서 '구남동'이라 명명했다고도 전해진다.
 
'독짓굴'은 '구남동' 서쪽의 자연마을로 민간에서 불리던 '독짓굴'의 '독지'는 '독조'가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역시 풍수사와 관련된 지명 유래설이 있는데 지세가 '독자형(獨子形)'이라고 말 한 후로 마을 사람들이 '독지굴' 또는 '독짓골' '독조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2010년 진행된 마을 미술 프로젝트 '독사천 흐르네'. 고경호 기자
현재까지 도로명주소로 쓰이고 있는 '독짓골'에는 마을 미술 프로젝트인 '독사천 흐르네'가 지난 2010년까지 진행됐다.
 
이도2동 보덕사 남측 아파트 밀집지역에서 실시된 프로젝트는 삭막한 아파트 옹벽에 제주옹기를 조각내 부착하는 방식의 벽화가 만들어졌으며 독사천 소년상과 기념비, 기념시 등이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돌로리' 또는 '돌로로'라고 불렸던 도남동, 제주중앙여고 북쪽과 북동쪽 일대의 '연로촌' 등이 자연마을이 있다. 고경호 기자

 

▲ '오현'을 기리는 다섯기의 조두석. 고경호 기자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송시열 등
유배 혹은 부임해 제주 발전에 공헌
 
제주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오현단'은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됐거나 방어사로 부임해 지역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 즉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오현은 충암 김 정(1520년 유배), 규암 송인수(1534년 목사 부임), 청음 김상헌(1601년 안무사 부임), 동계 정 온(1614년 유배), 우암 송시열(1689년 유배) 등이다.
 
이도1동에 따르면 오현단은 지난 1579년 목사였던 임 진이 사사된 김 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충암묘'를 세운 것이 시초였다.
 
이후 1665년 이중신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헌액했다.
 
그러나 1871년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이 문을 닫은 이후 1892년 김의정을 중심으로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현재에도 오현단에는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 다섯기가 세워져있으며 오현단 서쪽 병풍바위에 1856년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磨崖銘)인 '증주벽립(曾朱壁立)'과 김 정과 송시열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고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