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성…조선시대 제주목장·목축문화재 간직한 유적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11.수망공동목장②
활용방안 다양…"환경·전통 살리는 개발 고민해야"
겹담형태 중잣성 현재도 이용
수망리공동목장(조합장 현달평)에는 역사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는 목축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앞으로 목축문화 체험관광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이다.
목축만으로는 예전과 같은 소득을 거둘 수 없는 현실에서 어느 때든 다가올 수 있는 개발 논의에서 환경과 목축전통을 살리는 개발의 필요성이 마을내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다.
수망리의 목축문화재중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국영 마목장인 십소장을 설치하면서 축조한 '잣성'이다. 조선시대 제주도 목장사와 목축 문화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역사유적이라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높으며, 중요한 역사문화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특히 수망리 지역 잣성은 현존하는 제주도 중산간 지대 잣성 가운데 가장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데다 접근성이 용이해 '잣성 걷기' 등 관련 체험관광상품 구성이 용이하다는 평가다.
실제로 하잣성과 상잣성의 중간지점에 농경과 목축을 교대로 하기 위해 축조된 중잣성의 경우, 수망리에서는 아직도 목장내 윤환방목을 위한 경계담으로 아직까지 목축에 활용되고 있다.
하잣성과 중잣성 사이에서 우마를 방목할 때 중잣성과 상잣성 사이의 방목지에 있는 초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주민들을 동원해 튼튼한 겹담형태로 축조한 모습을 아직까지 생생히 볼 수 있다.
방목시킨 말들이 한라산 산림지역으로 들어가 얼어죽거나 잃어버리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상잣성과, 방목중인 우마들이 해안지대 농경지로 들어가 입히는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국마장의 하한선에 축조된 하잣성 역시 목장에서 수 ㎞내에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물영아리오름 연계 등 가능성
이와 함께 목장 안에도 우마방목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목축시설들이 남아있다.
수도시설이 없는 목장내 우마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오래 전 축조한 저수조는 현재도 이용되고 있고, 이밖에 목장내 시원하게 늘어선 경계림을 배경으로 서귀포시 해안의 풍경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공동목장내 우마를 관리해던 목감(고용 테우리)이 이용했던 관리사는 본래 맞은 편 목장에 있던 것을 도로 개설로 물영아리 오름입구 쪽으로 옮겨온 것으로, 현재는 수망리 생태마을 방문자 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 환경부가 보호하고 있는 람사르등록 습지인 물영아리오름을 활용한 체험프로그램 개발도 가능성이 높다. 관광객들의 방문이 점점 늘고 있는 만큼 승마장이나 목축 체험장, 테우리박물관 등 다양한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현달평 조합장을 비롯한 조합원과 주민들 역시 아직 구체적인 개발 계획은 없지만 현재로선 외부자본 매각은 고려하지 않고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공동목장이 마을 소유로 돼 있는 만큼 향후 개발을 한다면 환경부 생태관광마을 지정 등 정부지원으로 마을이 직접 체험관광을 진행하거나, 일정기간 마을회가 관광개발업체를 통해 임대 또는 공동개발 등 다양한 방식이 논의될 전망이다. 김봉철 기자
남원읍 수망리 마을회에는 마을공동목장과 관련된 몇 개의 귀중한 고문서가 남아있어 소개한다.
가장 오래된 고문서는 1926년에 작성된 수령원목축장축산회명부(水靈員牧畜場畜産會名簿) 및 회칙(會則)이다. 가입회원명부를 보면, 총 74명(2명 탈퇴)의 명단이 등장한다. 회원들의 구성을 보면, 수망리 35명, 의귀리 7명, 태흥리 4명, 신흥리 11명, 토산리 10명, 가시리 3명, 남원리 4명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이 목장이 위치한 수망리 목축민들이었다. 이 축산회에 가입한 회원들은 전통적으로 물영아리 오름 일대의 초지를 이용해 공동방목을 해오던 목축민들이었기 때문에 축산회 회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회칙의 주요 내용을 보면 축산회의 임원은 회장 1인, 총무 1인, 재무 1인, 간사 2인, 목축조사위원 1인, 구위원(區委員) 약간인으로 구성됐다. 임원들의 임기는 만 1년으로 정했으나 업무능력이 좋을 겨우 재선됐다.
목장 내 목축은 농작물 파종이 끝난 다음, 목장 내에 있는 돌담을 보수하고, 목장 출입구에 문을 설치하는 작업을 한 후 이뤄졌다. 목장에 우마를 방목시킨 후, 하루에 2명씩 번갈아가며 우마를 관리했다. 이때 순번이 적힌 번패(番牌)를 이용했다. 축산회에서는 회원 중 일부가 목장 내 돌담을 쌓거나 보수할 때 그리고 우마 관리 당번임에도 참여하지 않을 경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벌금을 부과했다. 회원들을 대상으로 축산회의 자본금을 대여하기도 했다. 목장 내 방풍림으로 심은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목일지(一木一枝)라도 훼손한 남벌자(濫伐者)에게는 손해배상 외에 벌금을 징수한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1930년대로 들어오면서 이 축산회는 수망리 마을공동목장으로 재편됐다. 이 과정에서 수망리 주민들은 제외한 다른 마을 사람들은 각기 자기 마을공동목장 구성원이 됐다.
1930년대 마을공동목장 설치와 관련된 고문서도 존재한다. 1935년에 작성된 고문서로 임야매도증서(林野賣渡證書)가 2개 남아있다.
하나는 할전원(割田員) 임야를 대금 3엔을 받고 김명반(金明班)이 당시 마을구장이었던 현달휴(玄達休)에게 매도한 증서이다. 또 하나는 김성홍(金性洪)이 대금 43엔64전을 받고 산2번지 임야(10정9반일무)를 이 마을 목장조합 부조합장 현달휴에게 매도한 증서이다.
1936년에 작성된 매도증서도 있다. 김태유(金太裕)가 대금 28엔을 받고 목장조합에 매도한 증서이다. 1936년에 작성된 계약서는 자신의 임야를 공동목장조합에 기부하고 이전수속을 하여 공동목장조합 소유가 된다는 것에 대해 계약한다는 내용이다. 이밖에 마을동동목장 자본을 조합원들에게 빌려주고 이자수입을 통해 자본금을 불려나갔음을 해마다 정월 16일에 작성된 '계산서' 문서를 통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