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년 동안 지역 특유 생활사 농축

[제주 생명숲 곶자왈 연대기] 18.곶자왈과 목축문화

2014-12-17     김영헌·고경호 기자, 김효철 상임대표

   
 
  ▲ 곶자왈은 골프장과 리조트, 관광개발 대상지로 전락되기 이전에 수만년동안 수렵과 채집, 목축과 농경생활을 이어가던 곳이다. 대정읍 무릉곶자왈에서는 제주사람들이 맨손으로 돌을 나르고 땅을 파고나무뿌리를 캐내며 밭을 만들며 살았던 흔적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무릉곶자왈에 남아있는 돌담(왼쪽과)과 곶자왈에서 자라고 있는 소.  
 
고려말부터 말사육…곶자왈 이용한 목축문화 발달
옛부터 방풍·그늘 등 계절별 가축관리 중요한 역할
무릉곶자왈… 생존 위해 밭 일군 흔적 오롯이 남아

수렵·채집·목축·농경 이어져

겨울비가 내리는 제주 중산간을 따라 오름들이 어슴푸레 어둠을 맞고 있다. 하지만 어느새 중산간을 넘어 한라산자락 밑까지 들어선 건축물들이 오름과 뒤엉켜 고즈넉한 저녁을 방해하고 있다.

서울이나 어느 대도시처럼 산자락까지 허물고 빌딩숲이 들어차듯 제주도도 곶자왈과 오름을 가리지 않고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불과 몇 십 년 사이 현실로 다가 오고 있다.

투자유치만이 제주도가 살길이라며 온갖 혜택을 주면서 개발에 매달린 결과다.

이제는 거대 자본과 기업들을 위한 골프장과 리조트, 관광개발 대상지로 전락해버렸으나 수만년동안 곶자왈은 수렵과 채집, 목축과 농경생활을 이어가던 곳이다.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말 사육이 시작된 것은 고려말이다. 고려충렬왕 2년(1276년) 7월 몽골(元)로부터 말 160마리가 수산평(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들어오면서 국가차원 목축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목축문화가 발달하면서 한라산 중산간은 많은 변화를 거치며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변했다.

쓸만한 땅은 불을 놓아 초지로 만들었으며 중산간 지대로 점차 생활영역이 확대되면서 식량을 얻기 위한 농경지 확보도 필요했다. 중산간 일대가 지금처럼 넓은 초지대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이후 중산간이 초지대로 변화하는 과정속에서도 곶자왈은 여전히 숲으로 남았으며 곶자왈을 이용한 목축이라는 독특한 문화도 발달했다.

겨울 중요 공간 부각

제주로 귀향왔던 이건(李健?1614~1662)은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서 '섬에서는 크고 작은 소를 여름이나 겨울이나 들에서 풀어놓아 길렀다.(島中 大小牛馬 無論冬夏 皆放?之而牧之於)'고 제주 목축문화를 기록하고 있다. 겨울이면 영하 날씨로 땅이 얼고 먹을 것이 없는 육지 사람 눈에는 제주에서 보는 겨울철 목축방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따뜻한 제주라지만 겨울이면 눈이 만만찮게 내리고 바람이 거센 중산간 목장지대에서 소나 말이 겨울을 나는 데는 곶자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곶자왈은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 뿐 아니라 겨울에는 바깥보다 따뜻하고 찬바람도 막아주어 추위를 견딜만한 곳이다. 곶자왈에서 자라는 어린 나무와 풀들은 겨울을 나는데 꼭 필요한 훌륭한 먹을거리가 된다.

지금도 목장과 한데 어울린 곶자왈에서 소나 말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때 '말은 제주로 보내라' 할 만큼 목축문화가 융성한데는 이처럼 곶자왈이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도민 생존을 위해 농사짓던 곳

하지만 이제는 곶자왈에서 소나 말을 키우는 것이 점차 옛일이 되고 있다. 시장개방속에 소값은 떨어져 힘들여 소를 키우는 일도 줄고 있으며 소나 말이 뛰놀던 곶자왈은 차츰 차츰 개발속에 사라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곶자왈을 개발하기위해 일부러 소나 말, 염소를 곶자왈에 가두어 기르며 나무를 죽이는 일도 가끔 벌어지고 있으니 고수목마 낭만도 옛 일이다.

목축문화가 발달해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은 밭농사였다.

곶자왈은 목축문화와 함께 한 뼘지기 농사터이기도 했다.

용암 암괴들이 뒤덮인 곶자왈이지만 지형적 영향으로 토양이 부분적으로 분포하고 있거나 작은 자갈이 덮여있는 곳은 제주사람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땅이다. 이른바 곶밭이자 화전이다.

대정읍 무릉곶자왈에서 볼 수 있는 화전터는 제주사람들이 맨손으로 돌을 나르고 땅을 파고 나무뿌리를 캐내며 밭을 만들며 살았던 흔적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재선충 방제작업을 하며 많이 허물어졌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크고 작은 돌들을 채곡채곡 쌓아놓은 돌담은 삶과 땀이 배어있는 소중한 문화유적이다.

하지만 곶자왈에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농사를 지어도 삶이 넉넉할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비료가 없던 시절이라 풀과 낙엽을 모아 거름을 하며 자연농법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렵게 일군 밭도 몇 번 수확하고 나면 곡식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농사를 지어야 했다.

제주 땅에서 농사짓기란 예나 지금이나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특별취재팀=김영헌 편집부차장, 고경호 사회부 기자 ▲외부전문가=김효철 (사)곶자왈사람들 상임대표.

고수목마…어원에도  '곶자왈' 있다

돌담 등 보전 위한 노력
테우리 가축 사육 역하 중요


제주섬을 대표하는 경승지 10곳을 골라 부르는 영주십경(瀛州十景)중 하나인 고수목마(古藪牧馬)에서 곶자왈과 옛 목축문화를 떠올릴 수 있다.

고수목마를 흔히 한라산 자락 푸르고 너른 풀밭에 말들이 뛰노는 모습을 연상한다.

물론 크게 잘못된 의미는 아니지만 고수목마를 정확한 글자풀이를 보자면 초원보다는 오래된 숲(古藪)에서 말을 방목한다는 의미다.

수는 곶 또는 고지를 일컫는 한자였으니 바로 곶자왈을 의미한다.

곶자왈은 주변 빌레지대와 한 데 어우러져 있으니 소나 말들이 먹을 풀이 많고 여름더위나 겨울추위를 피할 수 있어 목축에는 중요한 역할을 곳이다.

이 때문에 제주사람들은 곶자왈을 목축을 위해서나 산림 자원을 얻기위해서 보전해야할 곳으로 생각했으며 돌담을 쌓거나 불이 드는 것을 방지하며 보전해왔다.

곶자왈에서 소나 말을 풀어놓고 기르는 것을 ??곶치기??라고 하며 곶치기 과정을 거치며 야생에서 적응해 자랄 수 있는 소나 말이 된다. 이렇게 곶자왈을 비롯한 들과 숲에서 자라는 말과 소를 ??곶?????곶쇠??라고 불러왔다.

이렇게 야생화한 소나 말은 사납고 거칠어 막상 잡아들이려면 여간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서 밧줄을 던져 목이나 뿔에 걸려 잡아들이는 일은 '배질' 솜씨가 뛰어난 테우리들이 담당하는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