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축 전성시대를 기다리는 문화유산 풍부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 22.광령공동목장
상산방목·멤쉐·백중제 등 목축문화 전승 불구 쇠퇴
소 이용 '밧갈쉐' 훈련·땔감용 '쇠똥줍기' 등 전해져
광령공동목장은 천아오름 아래 해발 600~650m에 발달한 완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축산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다 지난해부터는 말산업 관련 학과를 설치한 제주한라대학교가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공동목장 운영과 관련된 방앳불 놓기, 낙인 그리고 밧갈쉐, 번쉐, 멤쉐 등의 목축문화가 부활을 기다리며 남아있다.
# 지난해부터 한라대에 임대
광령공동목장(조합장 강상훈·68) 내에는 목감집, 급수통, 약욕장(진드기 구제장)이 남아 있지만현재는 아쉽게도 기능이 정지된 상태이다. 소들로 넘쳐났던 공동목장이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한 채, 현재는 임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 목감막도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일부 형태가 남아 있어 입지조건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 조합장에 따르면 목감막은 목장내 산림이 없었던 시절, 한눈에 소들의 이동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높고 너른 곳에 들어섰다.
공동목장 내 방목기간 소를 관리했던 목감은 지원자를 임명했다. 비조합원이라도 목감이 될 수 있었다. 목감 보수는 겉보리, 돈, 조로 지불했다. 마을내 목감으로는 고덕훈씨(75)와 김달식(67)씨가 생존해 있다.
대체로 4월에 방목하고 10월에 집으로 데려왔다, 6월절 농사(조)시에 일시적으로 소를 데려오기도 했다.공동목장내 출역을 했다. 소를 올리기 전에 조합원들이 참여해 가시덤불 제거, 물통 굴착 및 보수, 경계돌담 정비 등을 했다. 불참시에는 '궐금'을 조합에 내도록 했다.
음력 2월경에 목장에 눈이 녹고, 새로운 풀이 돋아나기 전에 방화선을 구축해 방앳불 놓기를 했다. 낮에는 우마를 방목했다가 밤에 빈 밭으로 우마를 몰고 들어가 똥오줌을 싸게 한 다음 거름으로 이용했다.
# 진드기 피해 상산으로
광령공동목장에서는 또 상산 방목 풍습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상산에는 풀이 많으며, 진드기 없어 방목에 유리했다. 양력 6~7월 경에 상산에 쇠를 올렸다. 이 때가 되면 쇠파리들이 들끌어 저절로 소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상산에 올렸다.
상산에서 소를 찾을 때 점을 보거나 고사를 지냈다. 곤밥, 머리있는 구운 생선을 준비했다. 상산에 놓아둔 소들이 과거 남제주군 중문면 도순과 하원마을로 내려가는 사례도 있었다.
"가물면 쉐가 잘된다"도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상산 방목 이야기 중 하나다. 비가 많이 오면 상산에 올린 소들에 피부병이 생기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고 가물면 날씨는 좋기 때문에 질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가 없었던 집에서 다른 사람 소유의 암소를 대신 길러주고 송아지를 낳으면 나눠 갖는 '멤쉐' 풍습도 존재한다. 이를 통해 소가 없는 집에서 소를 조금씩 늘려갈 수 있었다.
백중제는 1980년대까지 지냈지만 현재는 맥이 끊겨 아쉬움을 남겼다. 예전에는 백중제 때면 목감 또는 조합장이 돼지머리, 과일, 생선 등을 준비했다.
물 문제는 무수천 상류에 있는 '치도'에서 나오는 용천수로 해결했다. '치도'는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시설이다. 치도의 용천수는 1970년대 후반에 기계로 퍼 올려져 한림에 있는 이시돌 목장까지 공급되기도 했다.
소들에게 밭갈이를 가르치는 '밧갈쉐' 훈련은 곰돌이나 나무, 섬피를 끌게 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시켰다. 산에서 통나무를 베어 낸 다음 이것을 끌고 집까지 가게 하면서 훈련을 시켰다. '치도' 밑에 있는 '오겡이도'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이곳의 나무를 베다 산림조합 직원에게 적발되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밧갈쉐 훈련은 해가 질 때까지 이뤄졌다. 그래야 소들은 어두워질 때 까지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일부에서는 거친 소들을 거세하기도 했다. 이 경우 숫소도 암소처럼 유순해졌다고 하며, 이런 소를 '중성귀'라고 불렀다. 거세를 할 때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사이에 고정시킨 다음 왔다갔다를 반복하며 녹여버린다.
촐을 먹은 소가 '쉐막'에서 똥을 눈다. 이것을 '돗통'에 놓아두면 인분과 돼지똥과 결합되어 거름이 생성된다. 이것을 10월경에 돗통에서 '골채'로 퍼내어 보리씨와 혼합시킨다. 그런 다음 '거름착'(맥) 2개에 담아 질메를 씌운 소 또는 말의 양쪽에 매달고 균형을 유지하며 보리밭으로 운반하기를 몇 일 동안 반복한다.
"키 작은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구박받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소의 양쪽에 거름착을 실을 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땔감이 적던 시절, 동네 여인들의 소똥줍기 경쟁도 치열했다. 쇠똥은 말려서 '굴묵'에 연료로 이용했다. 소들이 물을 먹기 위해 모이는 물통 주변에서 쇠똥 줍는 경쟁이 싸움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김봉철 기자▲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일제시기인 1943년에 작성된 '공동목장관계철'에 따르면, 이 목장은 제주도사로부터 1935년 6월1일에 설립인가를 받아 출범했다. 광령리 거주 주민들로만 구성된 공동목장이었으며 1943년 당시 조합원수는 305명이었다. 현재 공동목장의 면적은 40정보(39만6000㎡)로, 일부는 제주한라대학에 임대를 해주고 있다. 광령1리와 3리가 공동으로 목장을 이용했다. 광령2리는 별도의 공동목장이 있었다. 목장 동쪽에는 무수천과 그 지류가 위치해 있다. 무수천은 조선시대 4소장과 5소장을 구분하는 자연경계선에 해당하며, 이 목장부터 비로소 5소장이 시작됐다. 이 목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오목이도' 하잣의 '살체기문'을 통과해야 했다. 현재 이곳의 하잣은 건축공사로 인해 일부가 훼손됐다. 공동목장에 올리기 전과 공동목장에서 소를 마을로 데려왔을 때 번걸아 가며 돌보던 번쉐가 있었다. 마을인근의 촐왓에서 번치기 방목이 이루어졌다. 방목하려 가는 아침에는 "쉐 내몹써", 저녁에는 "쉐 맵써"라고 외쳤다. '육지놈뒈아진오둥이' '분틋골통' 등 마을과 가까운 촐왓에서 번치기 방목을 했다.
공동목장 조성에 필요했던 용지는 기부지, 차수지(임대료를 지불하고 빌려 이용했던 토지), 매수지로 이루어졌다. 특히 산176와 산180번지는 마을소유의 리유림(里有林)으로, 이 공동목장이 출범당시에 조합에 기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