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위기·한계 극복할 현대화·대중화 접근 필요

[살아있는 무형문화유산을 만나다] 중요무형문화재 22. 제67호 탕건장

2015-02-10     이소진 기자

 

 

▲ 탕건은 부드럽고 유연한 말총을 사용해 착용감이 좋고 견고했다. 땀이나 기름 때에 잘 오염되지 않고 휴대도 편하며, 세탁도 쉬워서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애용됐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기술'로 전승되는 구조의 한계가 우려되면서 탕건의 현대화·대중화로 접근하는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

조선시대 고유의 문화·디자인…17세기부터 유행
일제 강점기에도 제작될 만큼 인기…감귤값 비슷
딸에게 '기술'로 계승…"문화유산 활용 고민 필요"

'탕건'은 과거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이다. 사모나 갓처럼 말총이나 소꼬리 털로 만드는 관모 공예로, 속칭 '감투'로도 불린다. 탕건은 다른 관모 공예처럼 말총을 많이 생산하던 제주에서 주로 제작됐다. 그만큼 제주 여성의 노동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에 유행한 독특한 관모

탕건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모자임을 분명하다.
「경도잡지」 풍속조에 '당건'을 '탕건'으로 풀이하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재청에서 출간한 「탕건장(2000)」에 따르면 중국에서 탕건을 관모로 사용한 용례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당건' 역시 조선의 '탕건'과 모양이 달라 "탕건을 중국의 당건에서 연유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최남선은 「육당최남선전집」에서 "탕건은 감투에 기교를 더하고 재료를 국산 말총으로 바꿔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관모"라고 했다.

탕건은 17세기쯤 유행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614년에 편찬된 「지봉유설」에서 정주의 탕건을 안주의 총감투나 통영의 총갓양태, 석성의 망건 등 여러 말총 공예품과 함께 팔도의 특산품으로 열거됐다. 말총이 재료인 관모가 유행했다는 점을 들어 탕건도 널리 애용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주 일제강점기에도 제작

탕건은 일제 강점기에도 이용됐다. 대정 4년(1915)에 합방 5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에 '탕건'이 품목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특히 제주는 관모 공예로 많은 수익을 올렸다. 대정 10년(1921)의 통계에 따르면 이입 액수가 30만엔이었다. 8년 후에는 총판매액이 64만엔에 달하기도 했다.

「제주도세일람(1939)」에 따르면 조천 관모 공예품의 총생산액은 1만2000원이었다. 감귤이 1만1352원인 것과 비교해 큰 가치를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시기는 단발령(1894)이 있었던 일제 강점기였다. 탕건 등의 관모 공예가 성행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탕건장(2000)」에 따르면 보수성이 강한 지역에서는 단발령을 따르지 않은 양반들이 계속 탕건을 착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구나 육지에서는 일제의 삼엄한 경비로 말총 관모의 생산이 대부분 중지됐다. 이 때문에 제주로 주문이 증가했고, 식민지 정책에 반대해 간도나 시베리아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주문도 많았다.

 

 

▲ 위 정자관. 아래 겹탕건

△탕건 1개 제작에 1~3일

탕건은 부드럽고 유연한 말총을 사용해 착용감이 좋고 견고했다. 땀이나 기름 때에 잘 오염되지 않고 휴대도 편하며, 세탁도 쉬워서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애용됐다.

탕건은 줄수와 도리수의 촘촘한 정도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줄수가 줄어들지 않은 '줄살린탕건(막줄탕건)', 촘촘하게 딴 '좀진탕건(상탕)', 보통의 중탕건(중탕), 성글게 짠 영근탕건(하탕)' 등 4가지다.

탕건은 초촘한 정도에 따라 종류가 구분된다. 날줄의 콧수인 '줄수'와 탕건골을 따라 빙 둘러 한 바퀴 돌리면서 짜 올라가는 씨줄의 숫자인 '도리수'로 결정된다.

줄살린 탕건은 128줄·110도리라면, 상건은 310줄·120도리, 중탕은 154줄·98도리, 하탕은 117줄·150도리이다. 이에 상탕은 하탕에 비해 줄수와 도리수가 2배 이상 많아, 노동력이 더 필요했다. 하탕은 품질이 떨어지고 가격도 낮아 제작이 거의 안됐다.

제작방법은 골을 크기에 따라 받쳐 놓고 모양을 잡아가며 결은 뒤, 외형을 견고하게 굳히기 위해 골에 끼운 채로 삶아낸다. 외형이 잡히면 참 먹을 진하게 갈아 바르고 햇볕에 말려서 완성한다. 당시 1개의 탕건을 제작하려면 상탕은 3일, 중탕은 2일, 하탕은 1일이라고 전해진다.

△대물림 문화…대중화는 미흡

탕건장은 1980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당시 보유자는 김공춘씨가 선정됐으며, 현재 나이는 96세다.

이에 문화재청은 김씨를 2008년 12월 '명예보유자'로 지정, 차기 보유자로 그의 딸인 김혜정(69)씨를 보유자로 인정했다.

더구나 김혜정씨의 딸인 김경희씨(39)도 전수장학생으로 이름을 올렸다.

치밀하고 섬세한 자질과 오랜 시간에 걸친 숙련이 필요한 만큼 '대'를 잇는 탕건의 고유전통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어머니의 자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김혜정 보유자는 모든 장르의 탕건을 짤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손꼽힌다.

다만 '기술'로 전승되는 구조의 무형문화재의 한계는 우려되고 있다.

또한 탕건을 볼 기회는 제주시 전수회관이나 박물관뿐이다. 그나마 탐라문화제에서 보유자가 시연하는 모습을 직접 볼 기회가 있지만 1년에 1회에 그친다.

'사라질 위기'에 맞서 현대화, 대중화로 접근하는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 이소진 기자

▲ 1970년대 화북동의 탕건장들.

민요 '토속가'를 보면 관모 공예가 성행한 지역은 제주 북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천 근방 큰 애기들은/망근청으로 다 나간다/신촌 근방 큰애기들은/양태 틀기로 다 나간다/밸도 근방 큰애기들은/탕근 틀기로 다 나간다/도두 근방 큰애기들은 모주 틀기로 다 나간다'

조천에는 망건 작업이, 신촌에는 양태 작업이, 화북에는 탕건 작업이, 도두동에는 총모자 틀기가 성행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수요와 공급이 잘 맞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천·신촌·화북·도두 등은 조선 시대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중앙 관리의 왕래가 빈번했던 지역적 특성으로 관모의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탕건노래'에는 '혼코두코 걸렴시난/삼백예쉰코를 모치난/장을 보게 됐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제주 여인들이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탕건을 짜서 장에 내다 팔았다는 내용으로 제주여인들의 고된 노동을 드러냈다.

그러나 관모 공예가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사실도 분명하다. '탕건노래' 중에는 '이내 탕건 몾아그네/폴아그네 쏠도 받아먹곡/곤옷도 해영 입곡 할꺼우다'는 구절을 통해 탕건 팔아서 쌀이나 옷 등을 해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탕건은 망건과 갓과 짝을 이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는 구절도 있다. '어는 제랑/쑤물나건/놈광곹이 맹근 촐령/거리 노상 팡돌 우티 옺앙그네/가는 오는 사름 세여 보리/맹근 졸리난 탕근 생각 나더라/탕근 졸리난/더사 높은 갓 생각나더라'  이소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