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줄씨줄]사초

2015-02-16     김영헌 기자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 훈구세력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을 구실로 일으킨 사화로, 조선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로 일어난 사화다.

유자광 중심의 훈구세력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올린 일을 문제 삼은 것이 발단이 됐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중국 초나라의 항우가 죽인 의제의 죽음을 조위하는 내용이지만, 실상은 세조가 어린 단종을 죽이고 즉위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쓴 것이었다.

1498년 「성종실록」이 나오자 실록청의 당상관인 훈구파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넣은 조의제문의 내용이 단종을 폐위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고 공신들을 멸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평소 자신의 폭정을 비판하는 사림을 싫어하던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려진 극형)하고, 김일손과 김굉필 등 많은 사림파 세력을 귀양보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무오사화가 있은 지 500여년이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사초 실종' 논란에 대한 판결이 최근 나왔다.

사초 실종 논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여부를 놓고 벌어진 정쟁에서 시작됐고, 결국 국회는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을 열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회의록 원본은 찾을 수 없었고 새누리당은 사초가 폐기나 은닉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2013년 7월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법원은 녹음파일을 글로 풀어낸 정상회담 녹취록 초본은 결국 완성본을 위해 만든 것이고, 완성본을 만들고도 초본을 그대로 두면 비밀 유출의 위험도 있어 초본은 폐기하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다. 초본 삭제가 위법하지 않다는 것뿐 아니라, 완성본이 나온 상태에서 초본 삭제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결국 '사초 실종' 논란은 무죄로 끝났지만, 마음만 먹으면 건들여서는 안되는 '사초'를 들쳐볼 수도 있다는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