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 소 노닐던 곳 옛 목축이야기 '풍부'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26. 상명공동목장

2015-04-06     김봉철 기자

▲ 상명공동목장은 '알목장'과 '윗목장' 등 2개의 마을공동목장이 구성됐고 1960~1970년대 300마리 정도의 소가 방목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상명리 주민들은 상산에 소를 올리는 대신 '곶자왈'에서 겨울을 나게하는 풍습이 있어 흥미를 끈다. 김봉철 기자
알목장·윗목장 등 2곳서 암소·수소 따로 방목
상산대신 곶자왈서 겨울나는 '곶쉐' 풍습 존재
노동력 귀한 시절 소·사람 '융숭한 대접' 받아

제주시 한림읍 상명리 블랙스톤 골프장과 라온골프장 인근 아랫목장(알목장)과 조성동 윗쪽(윗목장) 등 2곳으로 이뤄진 상명리공동목장(조합장 석진형)은 한림읍에서 얼마 남지 않은 공동목장이다. 상명리는 특히 주변의 높은 개발 압력에도 묵묵히 전통을 지키며 목장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곶자왈서 겨울나는 '곶쉐' 풍습 눈길

한림읍 상명리에는 '알목장'과 '윗목장'으로 등 2개의 마을공동목장이 존재한다. '알목장'은 상명마을 아래인 한림읍 금악리 산70~90번지 일대로, 현재 라온골프장과 블랙스톤골프장, 그리고 문도지오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윗목장'은 금악리 산 43·44·45번지에 위치하며, 금악리 밝음오름 서남쪽에 해당한다.
목장 위치에 따라 방목 대상이 다른 점이 특징이다. 알목장은 암소와 송아지 방목지, 윗목장은 '부렝이'(숫소) 방목지였다.

1960~1970년대 상명리 주민들은 집집마다 적어도 소를 한마리씩은 키웠다. 공동목장은 300마리 정도의 소가 방목되며 전성기를 누렸다. 현재는 마을내 축산농가가 5곳으로 줄었지만 기업화된 방목으로 사육두수는 280여마리로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홍영화 제주시 한림읍 상명리 노인회장(80)에 따르면 상명리에는 현재도 예전 목축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4월이 되면 청명·한식이 지난 후 시기를 정해서 소를 올리고, 추석이 지나면 마을로 데려왔다. 가을에 촐을 벨 때 쯤 아랫목장에는 목초가 없기 때문이다. 이맘 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소들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목장입구로 먼저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곳에서는 상산(한라산)에 소를 올리는 대신 '곶자왈'에서 겨울을 나게하는 풍습이 있어 흥미를 끈다.

마을로 내려오지 않고 곶자왈에서 지내는 소를 '곶쉐'라 불렀는데, 장소는 검악마을(금악리)에서 했다. 지금의 블랙스톤 골프장 일대가 곶자왈이었는데, 이곳에 소를 풀어놓고 겨울철에도 집에 데려오지 않고 자왈 속에서 겨울을 나게 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주인은 촐을 등에 지고가서 소리쳐 자기 소를 불러 촐을 주곤 했다.

봄이 되어 새풀이 돋기 전에 목장에 불을 놓아 묵은 풀이나 진드기 등의 벌레를 죽이기 는데 이를 방애불이라 한다. 방애불을 놓기 전에는 미리 조합원들에게 알려 모두가 참석하도록 하는데, 묵은 집줄에 불을 붙여 그걸 들고 다니면서 여기저기에 불을 붙이거나 아니면 대비차락(대나무로 만든 빗자루)에 불을 붙여 들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불을 붙여 방애불을 놓는다. 상명리 공동목장의 경우는 목장 주위가 자왈이었기 때문에 목장 밖으로 불이 번지지 않아 따로 방호선을 만들지는 않았다.

"하루 밭갈이는 이틀 수눌음 몫"

상명리에서는 촐베기·밭갈이와 관련한 이야기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아랫목장 사이에 촐왓이 많았지만 개인 소유였기 때문에 아무나 베어 갈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건초를 사서 먹이는 일 없이 자급자족으로 해결해 왔기 때문에 지역에서 소를 몇 마리 키우느냐는 촐왓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촐 외에 건초를 사는 일은 1970년대 들어 조금씩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촐을 벨 때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사철에 소가 없는 집에서는 밭을 갈아준 일당을 촐을 베는 시기에 수눌음으로 일을 해서 갚는다. 하루 밭을 갈아주면 이틀 일을 해서 갚는데, 소가 일한 몫으로 하루, 밭가는 사람 몫으로 하루를 일을 한다.

밭을 갈아주는 날이되면 소도 사람도 대접을 잘 받았다. 밭가는 사람이 먹을 밥에는 팥을 넣은 곤밥과 옥돔구이, 자리젓, 계란 등으로 대접했고, 소에게는 밭갈기 전날 저녁에 촐을 미리 갖다 줘 소도 잘 먹고 밭을 잘 갈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융숭한 대접은 동부지역이 더 두드러졌는데, 4·3 이후 남자가 귀해 밭갈아 줄 사람이 적어지자 밭갈이 할 때면 여자가 잠대(쟁기)를 밭까지 가져다주고 가고 남자는 밭가는 일만 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촐은 하늬바람(북풍)이 불면 촐이 2~3일만에 잘 말랐다. 반면 운이 없는 경우 비를 맞아 소들이 잘 먹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베어낸 촐은 구루마나 경운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소 등에 한번에 40못(말은 36못)씩 실어 날랐다.

촐을 먹일 때도 그냥 촐만 주기보다 소들이 좋아하는 감자넝쿨과 콩줄기를 섞으면 잘 먹었다. 여름 장마 때 비를 맞고 쇠약해진 송아지에게는 보양식으로 계란에 참기름을 먹였고, 소들이 설사를 할 때에는 솥 밑의 숯검댕이를 조금 긁어 먹이면 나았다.

1970년대로 접어들되면서 숫소를 비육소로 키워 돈을 벌게 되는데, 소에게 보양식을 먹여 크고 살찐 소로 키워야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 공판장에 보내서 좋은 값을 받으면  소 한 마리 팔아서 당시 약 500평 정도의 밭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영양식으로 귀한 닭과 개도 잡아 먹였고 보리쌀이나 조 등의 곡식으로 죽을 쑤어 먹이기도 했다.
 

강만익 문학박사

1943년도 '공동목장관계철'에 나타난 목장이용 상황을 보면 목장조합명칭은 '상명공동목장조합'이었으며, 마을주민들만이 공동으로 목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조합원수는 109명이었으며, 1935년 9월20일 제주도사의 인가를 받아 설립됐다.

공동목장으로 이용된 모든 토지는 조합이 매입한 매수지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이 목장조합에서는 홍일화(洪日化) 외 85인의 사유지를 매입해 공동목장을 출범시켰다. 기부지나 차수지가 없었다.

당시 상명목장의 총면적은 '알목장'과 '윗목장'을 합해 143정보(42만9000평)였다. 알목장은 약 113정보였던 반면에 윗목장은 약 28~30정보로, 알목장이 윗목장보다 훨씬 넓었다.

그러나 알목장은 곶자왈이 발달해 있어 초지가 넓지 못했던 반면에 윗목장은 초지가 넓게 발달해 소 방목에 유리한 곳이었다.

목장조합에서는 설립당시 초지보다 곶자왈이 많았던 알목장을 보완하기 위해 초지가 발달했던 윗목장 땅을 매입해 목장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알목장에는 두 줄로 쌓은 경계돌담이 존재한다. 이 마을에서는 이를 '장담'이라고 부르며, 목장에 소를 방목하기 전에 조합원들을 동원해 장담을 보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