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멈춘 '미지의 땅' 옛 선조 숨결 그대로
[곶자왈의 '고유 이름'을 찾아서] 4. 머들(흘)곶<2> 발견되지 않은 삶의 흔적
2015-08-26 한 권·고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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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들곶 내 대규모 집터 내지 밭으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에는 1970년대 시행된 산림녹화사업으로 수많은 삼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사진=특별취재팀 | ||
밭작물 재배·숯 제작…원동마을 주민 생활 터전
4·3 당시 은신처, 경작지와 집터·가마터 등 확인
관련 학술조사·연구 미이행 역사문화 가치 내재
애월곶자왈의 일부지역인 머들곶(머흘곶)에 대한 역사문화자원 학술조사나 연구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제주4·3을 겪은 원동마을 생존자나 이웃마을 주민들을 통해 은신처와 경작터, 집터 등이 일부 확인됐을 뿐 실제 얼마나 많은 생활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머들곶 내 잔존하고 있는 유적들은 지금은 사라져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원동마을 주민들의 곶자왈 인식과 생활사의 단면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써 순차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돼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척박한 땅 일군 원동 주민들
옛 원동마을과 납읍리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머들곶'은 옛 선조들의 주거 공간이자 생존을 위한 삶의 터전이었다.
암석이 많은 척박한 지형적 특성에도 메밀, 감자, 조, 콩, 팥 등을 재배하기 위해 밭을 개간했으며, 그 과정에서 손수 돌들을 정리하면서 다수의 머들이 만들어졌다.
또 인근 소길·납읍리 주민들은 머들곶에 소들을 방목했으며, 가축들이 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돌담을 쌓아 놓기도 했다.
특히 옛 원동마을 주민들은 머들곶에서 재배한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으며, 숯을 구워 해안마을 주민들과 보리쌀로 교환하는 등 식량을 조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머들곶은 원동마을 주민들에 의해 '웃머들'과 '알머들'로 나뉘어 불렸으며, 현재의 평화로와 인접해 있는 알머들에서 주로 밭농사가 이뤄졌다.
선흘곶과 달리 습지나 연못이 없어 '정진내'라고 불리던 하천에서 물을 길어다 농업용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머들곶에 대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마을이 있었던 당시에는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기 위해 주로 대나무가 밀집된 곳에 터전을 삼기도 했다.
김태수 납읍리노인회장(73)은 "예부터 애월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곶자왈이 바로 머들곶이었다"며 "지금은 삼나무가 많이 심어져있어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원동마을 자체가 머들곶 안에 위치했던 만큼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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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숯가마터는 '촐'을 보관하던 장소로도 활용된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특별취재팀 | ||
△체계적 발굴 작업 과제
애월곶자왈의 중앙부이자 원동마을 남동쪽으로 들어간 머들곶에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크고 작은 암석들과 한 곳에 쌓여있는 돌무더기(머들)가 다수 확인됐다.
이들 돌무더기를 통해 이곳에서 경작이 이뤄졌음을 추정할 수 있었고, 주변에 4~5단으로 쌓아올린 돌담이 길게 둘러져 경작 면적을 가늠케 했다.
돌무더기가 밀집된 1320~1650㎡ 정도의 경작지에는 1970년대 시행된 산림녹화사업으로 지금은 수많은 삼나무들이 우거진 상태다.
인접지에는 숯을 구웠던 터도 발견됐다. 다만 숯가마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미뤄 제탄과정이 끝나면 허물어 버리는 흙숯가마가 설치됐던 장소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마터는 '촐'(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을 보관하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머들이 이어져 자연스레 돌담이 형성된 지구는 대규모 집터 내지는 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형이 평평한데다 1.2~1.3m 높이의 비교적 높은 돌담들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시기를 달리하며 이용된 유적도 이번 답사를 통해 확인됐다.
1960년대 이전까지 숯을 구웠던 주민들이 임시 거처로 사용했던 '숯막'은 4·3 당시에는 원동마을 주민들의 피신처로 사용됐다.
전체 면적은 약 5㎡로 4~5명이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며, 출입구는 성인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게 나 있다.
한 겹으로 쌓아 올린 돌담과 달리 1.4~1.5m 높이의 겹담으로 축조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생활유적 대부분은 머들곶 초입부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발굴 작업이 과제로 남고 있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한 권·사회부 고경호 기자 / 자문=정광중 제주대학교 부총장,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곶자왈을 이용했던 주민들의 전언을 토대로 과거 일제강점기부터 제주4·3을 전후한 시기까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밭을 일구고 소를 방목하고 숯을 굽던 생활터전이다.
머흘곶에는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는 물론 경작지, 방목지, 4·3 당시 은거지(후에 숯막 또는 테우리들의 임시 주거용으로 재이용), 숯 가마터 등 생활유적들이 산재해 있으며, 이들 주변에는 돌담이 이어져 있어 과거 원동마을 주민들의 보금자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용암류가 넓게 흘러간 자리에도 당시 소길리 주민들은 물론 상가리와 납읍리 주민들까지도 주변의 자연환경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는 것이다.
머흘곶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생활유적이 상당수 남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4·3 이후 사람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과 함께 삼나무 조림사업이 이뤄진 상태여서, 짧은 시간 내에 생활유적 하나하나를 발굴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다.
이들 생활유적을 조속히 발굴해 그 존재성과 가치를 밝히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머흘곶의 생활유적은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 자연을 소중히 여기며 활용하던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