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신화가 얼기설기 숲을 이루다

[곶자왈의 '고유 이름'을 찾아서] 5. 서림곶 <1> 구비전승

2015-09-09     한 권·고경호 기자
▲ 서림곶에는 구전설화와 얽힌 지명들이 많다. 사진은 오찬이궤로 힘이 장사고 한말 밥을 먹었다고 전해지는 소 도둑 오찬이가 살았던 굴이다. 특별취재팀
'오찬이궤' '성제숯굴' '정개밭' 등 다양한 스토리 품어
참가시나무로 숯 구워 인근 마을서 쌀 등 생필품 교환
제주목사 관리 파견 기와 구워…목관아·관덕정에 활용
 
「제주삼읍도총지도」(1770년대)에 등장하는 서림곶은 지난 1월 산림청이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한 무릉곶자왈을 일컫는다. 고지도의 서림수(西林藪)라는 한자 표기를 볼 때 제주 서부지역의 숲을 의미한다는 데서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림곶 내에는 역사유적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문화와 연관된 다양한 지명 유래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깃들어 있다.
 
△'입'으로 전해진 이름
 
서림곶에는 구전설화와 얽힌 지명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 관련 연구를 통해 확인된 지명은 개동산·웃빌레질·성제숯굴(성제숯굿)·오찬이궤·더럿이난빌레·궤등얼·장통물·봉근물·조피빌레·정개밭·도애남배·임개가시·삼가른구석·황물·황물고비(황물뱅디)·붉낭밭자왈·고래모들·별젯단·세흘·너삼동산·실거리낭빌레·양신재왓·궂은설덕·웃구석 등이 있다.
 
여러 지명 가운데 정개밭은 정씨란 사람이 화전을 일궜던 밭에서 연유한 지명으로, 정개밭 지경내에 묘지가 있는데 나룻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묘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 성제숯굴은 형제가 숯을 구웠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흑탄과 백탄 2개의 굴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매몰돼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오찬이궤는 힘이 장사고 한말 밥을 먹었다고 전해지는 소 도둑 오찬이가 살았던 굴로 궤안에는 훔친 소를 잡을때 사용했던 바위가 있으며, 그 북쪽으로 오찬이 숙소라고 일컬어지는 조그마한 굴이 하나 더 있다. 「제주설화집 」에도 오찬이에 대한 설화가 소개되고 있다. 
 
오찬이궤 주변으로는 오찬이가 동굴에 살때 먹다 남은 소고기를 나무에 매달았다가 잘라 먹던 곳이라는 더럿이난빌레와 '물을 봉그다(줍다)'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가뭄에도 바닥난 적이 없다는 봉근물이 있다.
 
이처럼 서림곶의 지명에는 지역적인 특징이나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 서림곶에 위치한 경작지로 조선시대 말에 개간돼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는 1000㎡ 규모의 밭이다. 돌들을 주워 세운 '잣벽'안으로 콩과 깨, 양하 등이 재배되고 있다.
 
△주민 의식주 밀접
 
서림곶은 무릉리 등 인근 마을 주민들의 의식주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삶의 터전이었다.
 
무릉2리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서림곶 내 '고래모들'이라고 불리던 곳은 예부터 맷돌을 만드는 돌과 연장방아용 돌을 채취하던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은 대형 연자방아를 마을로 옮기기 위해 곧게 손질한 참가시나무 수십개를 바닥에 깔고 그 위로 돌을 굴렸다.
 
참가시나무의 특성상 소나무보다 가볍고 튼튼해 커다란 바위를 굴려도 쉽게 파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차의 바퀴살을 참가시나무로 제작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서림곶 서쪽에 위치한 '삼가른구석'은 지금의 대마초로 불리는 '삼'을 재배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삼을 삶아 껍질을 벗기면 하얀 실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베옷과 밧줄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땅에 수북이 박힌 돌들을 주워 '잣벽'을 쌓아 놓고 조·보리 등을 재배했으며, 소를 방목하기 위한 마을 공동목장으로도 활용했다.
 
또 참가시나무를 베어낸 자리에서 일회용 숯가마를 쌓아 기다란 숯을 구워냈다. 서림곶에서 만든 숯은 모슬포 등 주변 마을에서 쌀과 고기 등 생필품을 구입하는 수단으로 요긴하게 사용됐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제주목사가 신평·무릉리로 관리들을 파견 보내 구워낸 기와를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로 보냈다.
 
김응부씨(71·무릉2리)는 "곶자왈을 낀 마을 중 가장 끝이 일과리로 마을 사람들은 서림마을이라고도 부른다"며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숲이 해안마을까지 이어져 서쪽에서 가장 큰 숲이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한 권·사회부 고경호 기자 / 자문=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곶자왈은 '쓸모없는 땅' '버려진 땅'으로 인식돼왔다. 곶자왈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무관심 속에 무차별적인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어 왔다.

그동안 곶자왈을 개발해 조성한 골프장(788.7ha)은 무려 10곳이나 되고, 신화역사공원(603.5ha)과 영어교육도시(397.7ha) 조성 등 곶자왈 내 택지개발이나 관광시설 조성뿐만 아니라 채석장(66.8ha) 등 곶자왈을 파괴하는 실태도 있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곶자왈은 '제주의 허파' '생태계의 보고' 등으로 새롭게 가치를 주목받고 있다.

산림청은 지난 1월 무릉곶자왈을 포함해 선흘·동복·저지·청수 등에 분포한 곶자왈 시험림 353㏊를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무릉곶자왈 시험림내에는 지금까지 동굴유적 1곳, 산전터 3곳, 머을 10기 이상, 숯가마 추정지 1곳 등이 확인되고 있다. 시험림 주변 3㎞ 이내에서 발견된 역사문화유적은 동굴유적 1곳, '불칸터' 마을유적이 있다.

이와 함께 구억리 곶자왈 도립공원 내에서도 바위그늘집자리 1곳, 돌숯가마 1기, 숯막 1기, 숯제조 작업장 1기, 수혈식움막 3곳, 산전터 2곳 등이 발견됐다.

무릉곶자왈은 목축 등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돼 주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소통됐던 지명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형의 형태나 특징, 식생, 우마용이나 식수용 물, 방목이나 꼴밭 등 목축, 숯을 구웠던 터나 화전과 관련된 지명들이 마을 주민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지명은 과거 주민들의 삶과 생활문화를 유추할 수 있다는 데서 전승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