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착 기암절벽 모냥이 창고 닮아 ‘창고천’
마을 일름도 ‘창고천리’에서 다시 ‘창천리’로
[제주어 전설] <50> 창천리 지명 유래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 일이라마씀. 대정고을에 강위빙이엥 는 사름이 대정현에 좌수로 이신 땝주. 강 좌수는 인품이 훌륭엿주마는 집안이 가난여부난 느량 초라 의관을 영 공사를 봐서마씀. 를은 강 좌수가 순력 도는 목사를 맞이기 위영 정의광 대정지역 중간인 중문 방멘으로 나가십주. 목사가 제주에 부임연 초도 순시는 때난 목사가 지역 라 가지 일에 관심을 졍 순시를 여서마씀.
경디 목사가 이녁넬 맞이레 온 강 좌수를 보난 행색이 너미 초라연 음이 씨어져십주. 경여도 는 일을 보난 행동이 딱 음에 들고, 사리가 분멩여마씀. 목사 일행이 대정지경으로 들어산 지금의 창천지경 내창에 앚안 휴식을 취단, 목사가 ‘저디 집 짓이문 당대에 대정 갑부가 날 건디게….’ 고 혼제만 중얼거리멍 강 좌술 베려봐십주. 그 말을 알아들은 강 좌수가 목사안티 꿇연 엎드리멍 “저안티 그 땅을 허락여 주시면 백골난망이우다.” 난 목사가 고갤 닥영게 강 좌수 보멍 빙색이 웃어서마씀.
강 좌순 대정고을에 싯단 집을 지금의 창천리 지경으로 이사여 와십주. 경 후제 아무도 살지 아니단 너른 벵뒬 개척기 시작난 멧 년 안 간 부제가 뒈는 거라마씀. 그로 후제 오태연(吳泰連)광 김두경(金斗崗) 등이 이사완 강 좌수 사위가 뒈연 일가족을 이루왓고, 그 사름덜을 중심으로 씨족부락이 형성뒈여십주.
원래 을 일름은 창고천리옝 여신디, 후에 창천리로 바꾸와서마씀. 지금 이 을을 흘르는 내가 이신디, 내 양착으로 기암절벽이 싯고 그 암벡 모냥이 꼭 창고 닮읍주. 경난 내창 일름을 ‘창고천(倉庫川)’이엥 엿고, 또시 을 일름도 ‘창고천리’옝 엿단 다시 ‘창천리(倉川里)’옝 거라마씀. (「제주도전설지」)
을 유래를 보문, 당초 이곳은 ‘포시남마루’옝 영 10여 가호가 모영 사는 족은 을로 조선조 현종 15년(1674)에 대정현 상모리 강진의 장남 강위빙이 설촌 을인디, 내에 창고처록 생긴 암굴이 싯뎅 연 ‘창고천리’로 불르게 뒈엿고,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토지 세부측량을 실시영 행정구역을 개편멍 ‘창천리’로 바꾸왕 불른 것이 오에 이르럼젠마씀. 경고 강위빙이 맨처얌 이주연 정착 디가 160번지 일대옝 주.
이 창고내를 랑 하류에 이르문 원시주거형태의 나인 ‘바위그늘집터’가 라 곳에 산재연 고고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이신디, 바위그늘집은 선사시대에 사름이 살앗단 제주말로 ‘엉’이엥도 곡, ‘엉덕’이엥 는 딜 말하여마씀. (마을홈페이지)
김창집 소설가·제주작가회의 자문위원
느량 : 늘. 언제나
혼제 : 혼자
빙색이 : 소리 없이 빙긋이 웃는 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