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제주인 역사와 함께 한 '미지의 숲'

[마을과 살아 숨쉬는 곶자왈] 3. 송당곶자왈

2016-07-12     한 권 기자, 고경호 기자
송당·평대·한동리 등 여러 마을을 끼고 있는 송당곶자왈은 둘레만 99만1700㎡에 이를 만큼 광대한 숲으로 예부터 방목·농사·숯 생산·사냥 등 주민들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끼쳐왔다. 사진은 이승헌 미디어하루 대표의 도움으로 드론(무인항공기)을 통해 촬영한 송당곶자왈 전경. 특별취재팀

송당·평대·한동리 등 분포 마을마다 마소 끌고와 방목
겨울에는 숯 굽고 땔감 베어 해안마을서 쌀·고기로 교환
4·3때 마을 경계 위해 소실 조림사업으로 생명력 찾아

예부터 곶자왈은 개인이나 한 마을의 소유가 아닌 주변 여러 마을주민들이 함께 삶을 일궜던 공동의 공간이었다. 
송당곶자왈의 옛 이름인 '한마을곶'은 송당리뿐만 아니라 평대리, 한동리 주민들이 함께 이용했다는 의미에서 명명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유 이름에서부터 곶자왈의 이용사(史)적 측면이 반영된 셈이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개발의 그림자를 비껴온 송당곶자왈은 사람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여러 마을 걸쳐 둘레만 99만㎡

송당곶자왈은 선흘·수산 등 제주 동부지역 곶자왈처럼 방목지로 사용됐다. 송당·평대·한동리 등 여러 마을을 끼고 있는 송당곶자왈은 둘레만 99만1700㎡(30만평)에 이를 만큼 광대한 숲이었기 때문에 마을마다 소와 말을 끌고 와 방목했다.

중산간 마을인 만큼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메밀, 찹쌀, 조 등을 곶자왈에서 재배했다. 또 농한기인 겨울철에는 큰 나무들을 베어다 숯을 구웠으며, 잘라낸 가지들은 겨울나기를 위한 땔감으로 사용했다. 

작은 나무들은 장작으로 손질했다가 먹을 게 귀할 때 숯과 함께 해안마을로 가져가 쌀과 고기 등 식료품으로 교환했다. 

이외에도 말총으로 꿩코 등 함정을 만들어 꿩과 참새를 사냥했다. 

나무와 관련된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한마을곶에 비자씨를 뿌리러 내려왔다가 장소가 마땅치 않아 주변 다른 곳에 뿌렸는데 그곳이 바로 '비저곶'으로 현재의 비자림이다.

신이 비자림으로 이동하던 중 씨 하나를 떨어트려 한마을곶 한 가운데 딱 한 그루의 비자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이 비자나무는 마을 주민 중 누군가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베어내면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제주사와 함께 소멸과 재생 반복

송당곶자왈은 굴곡진 제주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소멸과 재생을 반복했다.

방목지이자 농사지을 땅이었으며, 사냥터이자 숯과 장작, 땔감을 마련했던 공간인 송당곶자왈은 제주4·3 때 수난을 겪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제주4·3 당시 극도의 생계난이 지속되자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곶자왈에서 대규모로 나무를 베어다 숯을 구웠다. 

또 주민들은 제주섬 곳곳에서 학살과 수탈이 잇따르자 마을 경계를 위해 곶자왈 내 대부분의 나무들을 제거하는 등 제주4·3의 광풍을 피하지 못했다. 4·3 이후 송당곶자왈은 주민들에 의해 다시 방목지로 이용됐고, 1960년대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됐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생명력을 더해가던 송당곶자왈은 1990년 당시 북제주군에 의해 분뇨처리장 부지로 결정되면서 또 한번 위기를 맞는 듯 했지만 주민 반대에 의해 무산됐다.

고정식 송당리장은 "당시 곶자왈은 쓸모없는 땅으로 인식됐지만 주민들은 숲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개발 위험에서 지켜냈다"며 "지금도 송당곶자왈은 주민들에게 마을의 상징이자 알려지지 않은 '히든카드'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한 권 사회부·고경호 경제부 기자

 

"세화장 다녀오면 반나절 훌쩍 지나"

[인터뷰] 송당곶자왈 거주 김학수 할머니

제주4·3 때까지 부모와 함께 송당곶자왈에서 생활했던 김학수 할머니(81)는 지금까지도 당시의 기억을 오롯이 품고 있다.

김 할머니는 "'세순당'이라 불리던 알부락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부모님과 언니와 함께 곶자왈에서 살았다"며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아 키우던 고씨 부부와 함께 단 2가구만 살았는데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나만 남았다"고 말했다.

이어 "두 집 모두 곶자왈에 있던 돌로 쌓아 만들었으며 초가로 지붕을 덮었다. 전기가 없었을 때라 유채기름을 이용해 등잔불을 켰다"며 "곶자왈에서 농사 지은 잡곡으로 밥을 해 먹었다"고 회상했다.

김 할머니네 가족 역시 주변 마을 사람들처럼 숯과 땔감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김 할머니는 "숯과 땔감을 조랑말에 싣고 해가 뜨자마자 집에서 출발하면 아침 8시쯤 세화오일장에 도착한다"며 "숯과 땔감을 팔아 쌀과 고기, 생필품을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한두시다. 장 보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고 얘기했다.

곶자왈에서 생활하던 김 할머니네 가족에게 소는 농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재산이었다.  

김 할머니는 "당시 어미 소 2마리와 송아지 4~5마리, 말 4마리를 키웠다"며 "아버지가 '쇠   오라'하면 곶자왈을 돌아다니며 방목한 소들을 확인해야 했다. 조랑말은 장을 보러가거나 물을 길러 갈 때 이용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할머니는 "몇 해 전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보려 했지만 지금은 숲이 너무 우거져 들어가지 못해 안타까웠다"며 "먹을게 생길 때마다 고씨네 가족과 나눠먹던 그 시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