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었어도 가슴 뛰는 희열을 느끼다
치유와 성장을 위한 독서 산책 38.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정열의 의미, 삶을 통해 실천하다
한 사람의 자유로운 영혼을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한동안 그를 만나고 내 영혼이 춤을 추고 있다면 과장일는지. 그렇다고 해도 당분간 나는 조르바의 단호하면서도 거친 말과 춤, 산토르 연주에 젖어있고 싶다. 내 영혼은 오랫동안 부박하게 시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직접 만났던 실존 인물이다. 1917년 카잔차키스는 갈탄사업을 벌이는데, 이때 조르바와 6개월 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로부터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얻었다고 한다. 조르바는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 '창조적 단순성', '대담성',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 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르바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부활된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작품을 통해 부활시킴으로써 카잔차키스 자신도 구원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인 셈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일인칭 화자인 바실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에서 1년 남짓 함께 한 이야기가 소설의 내용이다. 이 소설은 35세의 바실이 65세의 조르바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실은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의 카페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우연히 조르바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크레타로 간다. 그곳 폐광에서 갈탄을 채취하기 위해서다. 갈탄사업이 성공하면 그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눠 갖고 형제들처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일종의 공동사회'를 만들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다.
바실은 작가다. 그는 책속에만 파묻혀 산 '책벌레'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노동자, 농부처럼 노동하는 사람들과 살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가기로 한다. '행동하는 인생'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조르바는 '냉소적이면서도 불길같이 섬뜩한 그의 강렬한 시선'과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를 가진 인물이었다. 바실은 그를 감독관으로 임명한다. 그가 책을 통해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인물로 이해한 것이다.
다른 정열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인간의 구원, 무엇으로 가능한가
조르바가 추구하는 것은 자유였다. 그에게는 도덕이나 신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들로부터 끊임없이 지배당하려 한다. 조르바의 말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있는 바실마저도 책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갇혀 그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바실과 조르바는 수도원 소유의 소나무 숲에 대한 벌목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수도원에서 쫓겨난 자하리아라는 수도승을 만난다. 자하리아는 수도승에 대해 '돈, 자존심, 젊은 사내아이'가 '수도승의 삼위일체'라고 말해준다. 자하리아의 말대로 그들이 수도원에서 본 것은 탐욕, 식탐, 욕정, 남색행각, 살인 등이었다. 수도원의 수도승들의 삶마저 탐욕과 욕정에 사로잡힌 악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가능한가.
조르바는 인간 구원의 열쇠를 춤이라고 한다. 조르바에게 춤은 '불가능을 성취하려는 악전고투'의 하나였다. 그는 세 살된 아들의 죽음 장면에서도 춤을 췄다.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조르바에게 춤은 절망을 극복하는 에너지로 작동하기도 한다.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정말 미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조르바의 춤이 등장한다. 조르바는 산꼭대기에서 벌목한 소나무를 해안으로 내려 보낼 케이블 고가선 설치를 끝내고 개통식을 가진다. 그런데 수도원장을 비롯한 수도승들과 마을 유지들이 보는 앞에서 케이블은 굉음을 내며 부서지고 만다. 꿈꾸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그 일로 바실은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해변을 따라 마을을 향하는데,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고, 숭고하면서도 이상야릇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 같은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설명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극을 이루는 감정을 느낀다.
새로운 세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
그렇다.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는데도 가슴이 뛰는 희열을 느꼈다는 것은 어쩌면 억지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실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세상 바닥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자유 말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서 알게 되는 어떤 가능성. 어쩌면 인간이 진심으로 꿈꾸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아닐까. 어제와 말끔하게 이별할 용기만 있다면 새로운 세계를 만남, 새로운 사랑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인 조르바로부터 배운다. 그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 강은미 시인·치유적 독서모임 '산책'회원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과 터키 지배하의 기독교인 박해 겪으며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썼다. 나중에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유럽의 철학·문예·사회사조 등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자연인의 본원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았으며, 그의 이러한 신념은 고향을 무대로 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잘 반영됐다. 그리스 난민의 고통을 묘사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시작(詩作)으로 근대인의 고뇌를 그린 장편 철학시 「오디세이아」가 그의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