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쉬는 골목 유산에서 맥을 길어 올리는 일
제주, 노포를 봉그다-프롤로그 시대, 인식의 변화, 경제적 요인 등 ‘삶’ 흔들어 핵심경쟁력 분석 장사 이상 ‘신용’지키는 힘 작동 인간 관계로 쌓은 무형의 재산 뿌리 내림 연결
코로나19의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면서 오래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향수가 깊어졌다. 알고 있던 것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기억에서 잊혀지는 아쉬움을 한꺼번에 경험한 때문이다. 팬데믹 이전에도 높았던 ‘노포(老舗)’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추진력을 얻는다. 그들의 무거운 입을 열게 하는 이유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노포’라는 어휘에 대한 고민과 ‘오래 갈 수 있는’ 환경 부재다. 달리 쓸 말이 없어 일단 노포라는 단어를 꺼내 쓰지만 이 여정의 끝에 함께 내걸 이름을 만들자는 것, 그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해답을 찾자는 것이 있음을 밝혀둔다.
△오래 갈 수 없는
재개발 여파로 37년 된 오랜 평양냉면집 ‘을지면옥’이 영업을 중단(2022.06.25.)했다는 소식이 전국을 흔들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서 동네 역사 상징이자 문화자산으로 꼽히는 곳인데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 백년가게여서 그 파장은 컸다. 코로나19 영업 악화나 임대료 상승 같은 숱한 이유가 아닌 재개발 때문이란 사실이 더 아팠다.
을지면옥이 있던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은 2017년 재개발 사업시행인가를 받아 2019년부터 보상과 철거 절차가 진행됐다. 을지면옥은 재개발 시행사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소송전을 벌이다 지난 14일 부동산 명도 단행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며 새로운 장소로 떠나게 됐다.
서울시가 불과 몇 년 전 정비 사업 등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노포들을 보호하는 발굴사업을 벌이면서 ‘오래된’과 ‘오래 가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은 ‘오래 가게’라는 명칭을 만들었던 일이 무색해졌다. 시대와 인식의 변화, 경제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하지만 그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용을 치러야 한다.
△한결같음의 힘
몇 해 전 국내 유수의 음식 배달 서비스 회사에서 우리나라의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알 수 있다면 이것을 잘 정리해 자사 서비스를 쓰는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그 덕에 장사한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막상 결과가 나온 뒤 업체는 발표는커녕 내용을 조용히 접었다. 비밀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전혀 알려줄 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래된 맛집의 비밀에는 고집스런 경영철학이나 한 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비밀 레시피도 있지만 압도적으로 단 하나의 변수를 가리켰다. ‘자가점포’. 자기점포에서 영업을 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맛집들이 장사를 이어가지 못했다.
업체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폐업 수순을 밟는 곳도 부지기수다. 모두가 변화와 혁신을 외치는 상황에서 전통과 자부심이란 이름으로 ‘노포’를 지키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자리를 지키는 배경에는 ‘한결 같음’이 있다. 성장했다고 해서 함부로 다른 영역으로 손을 뻗치지 않고, 늘 조금씩 변해가면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버틸, 지킬, 뿌리 내릴 힘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키자, 지켜내자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오래 가는 가게’는 강한 가게다. 수익성과 매출보다는 ‘지속 가능한 생명력을 갖췄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최소 100년은 넘어야 불릴 자격을 얻는다는 ‘시니세’ 일본의 노포에서 찾은 키워드다. 일본의 문화적 특성을 안다면 장인 정신과 시류와 타협하지 않는 근성(기질)을 우선 순위에 둘 일이지만 실제 그들의 선택은 전통에 걸맞는 신뢰(신용)와 시대 흐름에 맞춘 과감한 변화 시도였다. 이 시니세를 분석한 우리나라와 일본 자료를 분석해보면 겹치는 부분이 꽤 많다.
시니세들은 성공 제1조건으로 창업시대부터 이어지는 가훈(사훈)의 계승을 꼽았다. 다음은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핵심경쟁력과 이를 기반으로 한 혁신의 노력, 세번째는 기업의 최고 가치를 기업의 존속(승계)에 둔다는 점이다.
여행작가 임경선씨는 저서 「교토에 다녀왔습니다」에서 일본 내 100년 이상 된 노포의 특징은 “한눈팔지 않고 질 좋은 제품으로 보답하고, 내가 원조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자기 가게만의 고유한 색깔을 지켜나갈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업종 변경은 있어도 엇비슷한 분야의 일을 하는 것으로 대를 잇고, 부침을 다소 겪어도 꾸준히 장사가 잘 되고 있으며 셋째, 오랜 경영으로 얻은 고객의 신용, 편애 등 인간관계에 기초한 무형의 재산을 보유하는 점에 주목했다. 그 가게만의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인 제품이 있어야 하고 생산과 판매를 겸한 장인이자 상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꼽는다.
제주에서 찾은 골목 유산들도 당연히 비슷한 신호를 낸다. 굳이 확인하는 이유는 그러니 지키자, 지켜내자는 목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