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미학
[책 읽어주는 남자] 월트 휘트먼 「풀잎」
온 천지가 초록으로 물들었다. 산천초목이 온통 초록 물감을 뒤집어쓰고 있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풀은 풀대로 푸르다.
화려한 연두색 치마처럼 펄럭이던 봄은 가고 신록의 풀과 나무가 춤을 춘다. 푸른 풀밭을 밟고 있으면 세상은 거대한 녹색의 정원이다. 여린 나무 이파리들은 촉촉한 윤기를 뿜어내고 새들은 숲속 나무와 풀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면서 지저귄다. 숲속에서 온갖 자연의 소리에 귀를 세우고 심호흡을 하다 보면 세상에 시달린 영혼은 맑게 회복된다.
한반도에는 4500여 종의 식물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1500여 종의 풀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풀은 흔히 초본식물이나 잡초라고 부르며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나무와 달라서 줄기가 연하고, 대개 한 해를 지내다 죽는다.
한해살이풀은 일년생 초본으로 1년 이내에 발아하고 개화하여, 결실한 후 시들어 죽는 풀을 말한다. 벼, 콩, 호박 등의 대부분 초본들이 이에 속한다. 물론 싹이 트고 그 이듬해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뒤 죽는 두해살이풀도 있다. 보리, 무, 유채, 완두가 그들이다.
풀이 지닌 이런 생명성과 물리적인 모습은 신화적 의미와 문학적 상징을 나타나게 한다. 우리의 무속 신화 '바리데기 이야기'에서 풀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사회생의 식물로 등장한다. 바리데기 부모를 살린 영약인 개안초(開眼草)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재생의 약으로 이것은 결국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학적 측면에서 풀은 더욱 중요한 상징으로 다양하게 사용된다. 풀 중에서도 봄에 돋는 풀은 꽃과 함께 생명력을 상징한다.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말이 있으며, 풀의 생명력에 대한 직접적인 감흥을 드러낸 말로 녹음방초(綠陰芳草)라는 풀에 관한 고사성어도 있다. 풀은 변하기 쉽고 시들어가는 생명체로 인생무상이나 인간사의 덧없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초여름의 햇살이 쏟아지는 앞마당 뜰에서 바라보면 온통 눈에 들어오는 것은 풀들의 일색이다. 발아래 잔디밭과 담장 안팎의 온갖 풀들이 푸르름을 잔뜩 자랑하고 있다. 김수영 시인은 '풀'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고 울다가 또 눕는 것은 흐린 날 비를 몰아오는 '바람' 때문이라 하고 있다. 어두운 삶의 현실에서 억눌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풀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풀은 아무의 눈길도 받지 못하며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지만 어디서나 평등하고 우애롭다.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풀잎」에 나오는 유명한 '나의 노래'에서 풀잎을 이렇게 노래한다. "어린이 한 명이 손에 풀을 잔뜩 뜯어 쥐고서 나에게 물었다. '풀이란 무엇인가?' 하고···. 그러나, 나도 또한 어린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풀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란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휘트먼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한없이 풀을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 풀을 볼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은 마치 초록색 희망 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풀은 희망의 초록색 천으로 짠 것으로서, 내 느낌의 깃발이다"라고 말한다. 그러기보다도 풀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떨어뜨린 손수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풀은 식물이 낳아 놓은 갓난애일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 어머니의 무덤 자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