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 오는 소리 들리나요
벌초를 다녀왔다. 아들 없는 집 세 자매는 벌초 때만 되면 신경전이다. 날을 잡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산을 찾기도 가물거려 여기인지 저기인지 자신의 기억을 더듬다 시작부터 진이 빠지기 일쑤다. 옛날 사람들은 왜 그리 먼 곳에 묘를 썼는지 오름을 몇 개나 넘었는지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조상 묘를 벌초하는 일은 아무 생각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풍습은 언제부터 내려온 것인지, 얼굴도 모르는 조상 묘를 벌초하는 일이 윤리의 문제라 할 수 있는지 등을 따지다 보면 답이 없다. 거부할 수는 있으나 후탈이 더 두려운 것이다.
세 자매는 각자의 시댁 벌초도 있어 모이는 시간을 잡을 수 없어 시간 되는 대로 역할을 분담해 벌초를 하기로 했다. 막내는 가장 일찍 출발해 가장 먼 곳의 산을 찾아 나섰고, 둘째는 시댁 벌초 끝나면 온다고 하고, 나는 길을 찾느라 헤맸다. 내가 길을 찾느라 헤매는 시간에 올케는 아버지 산소 벌초를 했다는 전화가 왔다. 혼자서 그것도 낫으로 하느라 숨이 턱턱 막혀 집으로 가야겠다 하길래 그러라 했다. 어찌 됐든 둘째네를 만나 아버지는 산소에 가보니 말끔히 이발한 봉분이 시원스레 햇살을 받고 있었다. 둘째는 술 한 잔 따르고 자손들 잘 봐달라고며 절을 한다. 착잡한 먼 산만 바라보았다.
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 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 조카들이 신식 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 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 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 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이홍섭 시 「벌초」 전문)
시에서 벌초라는 게 "벌 받는 초입"이라는 발상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예초기로 하는 것보다 낫으로 벌초를 하는 마음도 알 것 같다. 그러니 이채는 사채가 무섭고 벌은 후불이 더 무섭다. 두고두고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승오 감독의 영화 '이장'을 본지 꽤 된 것 같다. 영화 '이장'에는 남동생을 둔 네자매이야기이다. 네 자매는 각각의 사연들을 안고 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힘들어하는 딸, 육아휴직 신청서를 냈다가 권고사직 당할 판이다. 둘째는 남편의 외도로 마음이 심란하다. 여성운동을 하는 막내는 사회 곳곳에 뿌리 박힌 가부장제와 불평등에 진절머리 날 판이다. 그 와중에 하나뿐인 아들 승락의 여자친구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상태다. 가족이 울타리라기보다는 어찌보면 서로는 짐처럼 느낀다. 누구 하나 변변하게 사는 삶이 없다. 이장을 하러 집에 모이는 시간까지 여정이 너무나 힘겹고 고달프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가족의 현실에 이제껏 애써 포장하려 했던 '가족의 행복론'이 역겨워진다.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가족 마다 처지가 다르고 문제나 상황이 다르다. 행복은 밤하늘의 별이나 가져다 주는 것이지 가족들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때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라는 감정은 중요하다.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 붙잡을 수 있는 구명막대 하나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무딘 조선낫 들고
엄니 누워 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 발톱 깎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이재무 시, 「벌초」 전문)
봉분이 훤하게 드러난 묘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묘하다. 이마에 덜 깎인 억새도 뽑아주고 싶고 발은 시리지 않을는지 갈참나무 이파리로 덮어주고 싶다. "생전에 씻지 않기로 유명한 양반인데, 죽어서야 손톱 발톱 다 깎네" 우스개 소리도 하면서 처음으로 가족이란 걸 느끼게 되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극단적 거리감이 오히려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죽음이란 최고의 미학적 거리를 부여한다. 궁시렁대며 출발한 '벌의 초입'이 한 사람과의 현실감 없는 이별을 생생하게 재현시켜주고 있는 것에 감탄한다. 9월의 시작이 순조로워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