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사람 얀 얀센 벨테브레, 조선의 관리가 되다
김유정의 제주도 5. 박연(朴淵)
조선의 서양인들 관문 제주도
동으로 오는 유럽의 팽창주의
박연 고향 드레이프시 동상 눈길
△최초의 서양인
무슨 일을 했든 최초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야릇한 호기심이 간다. 최초로 조선에 온 서양인은 누구였을까. 앞 순위 세 명의 서양인들, 황당선을 타고 제주도를 거쳐 온 사람들 말이다. 첫 번째는 배가 난파된 마리니, 두 번째는 배의 식수 고갈로 물을 뜨러 내린 박연과 두 명의 선원, 세 번째는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으로 가다 난파된 하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제주에 표착해 조선으로 왔다는 것이다.
첫 번째 조선에 온 서양인은 마리이로 1582년(선조 15년) 가을에 중국 복건성 사람 진원경과 동양사람 막생가가 제주도에 표류했다. 마리이는 제주도에 표착한 최초의 포르투갈 선원이었는데 마리이는 본명이 아니라 포르투갈어로 '선원'을 뜻하는 마리녜이루의 음차이며, 그 선원의 진짜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마리이 일행은 문정(심문)을 받은 후 조선에 머물지 않고, 명나라로 가는 조선사신 진하사 정탁(1526~1506)의 호위대와 사행길을 따라서 명나라로 송환됐다.
두 번째로 온 서양인은 박연이었다. 박연의 본명은 얀 얀센 벨테브레(1595~?)로 남만인 즉, 네덜란드 드라이프 출신의 선원이다. 박연은 1626년 3월 15일 네덜란드 드라이프 마을을 떠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홀란디아호에 승선해 동인도회사의 항로를 경유했다. 이듬해인 1627년 바타비아(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다시 아우베르케르크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박연의 배는 당초의 계획보다 항해가 오래 걸려 먹을 물마저 바닥나서 급히 식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1628년 급기야 제주도 앞바다에 배를 세우고는 물을 구하려고 박연과 두 명의 선원은 보트로 갈아타서 노를 저어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 선원들은 제주도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식수를 채우기도 전에 섬 주민들에게 발각돼 급보를 듣고 달려온 제주 병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우베르케르크 호에서는 선원들이 체포된 것을 알고 얀 얀센 벨테브레(박연)와 같은 드라이프 출신 디르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터슨을 남겨두고 홀연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 후 조선 병사들에게 붙잡힌 세 명의 선원들은 도성인 한양으로 호송돼 오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당시 조선의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던 까닦에, 특히 벨테브레가 화약 제조와 무기 다루는 법에 능숙한 것을 알고 인조(1623~1649)는 그를 자신의 자문관으로 임명해 훈련도감에서 일하도록 벼슬을 내렸다. 시간이 갈수록 생활이 안정된 벨테브레는 조선 여성과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낳았고, 박연이라는 조선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박연에 대한 기록
「초사담헌」에 의하면, 박연은 생김새가 우뚝했고, 선악과 화복을 말할 때마다 "급급해 하지 말라. 하늘이 보답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그 말이 도를 깨우친 사람 같았다고 한다. 자기 나라의 풍토를 말하며 "따뜻한 곳이라 서리와 눈이 없지만 늘 날씨가 흐려 이슬이 많이 맺힌다"고 했다. 자기 나라의 국법에 도둑질을 한 자는 무겁고 가벼움에 상관없이 전부 죽이므로 나라에 도적이 없다고도 했다. 배를 타고 일본, 유구(오키나와), 안남(베트남)은 박연이 교역을 한 곳이다. 박연은 또 소인국에도 가봤다고 했는데 그 곳 사람들은 비단옷도 잘 만든다고 했다. 섬사람들에게 "고려의 풍속은 인육을 구워 먹는다"는 말을 들어서, 탐라에 도착했을 때 마침 날이 저물어 태수(목사 또는 현감)가 횃불을 밝혀 살피니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며 "이것이 우리를 굽는 도구이구나"라고 생각했다가 한참 뒤에야 그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박연은 "아무리 추워도 솜옷을 입지 않았고, 몸이 장대했으며, 파란 눈에 흰 얼굴로 누런 수염이 배까지 드리워져,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우리나라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았다" 박연의 사망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1666년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정다산(정약용)의 「이아정(이덕무)의 비왜론에 대한 평」에 따르면,"효종 4년(1653)에, 표류하던 선박이 진도에 정박했는데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절반이나 됐고 살아남은 사람은 36인이었다. 다시 제주(濟州)에 정박했는데 언어와 문자가 통하지 않아서 우리나라(조선) 사람들은 다만 서양 사람, 혹은 남만 사람이라 일컬을 뿐, 끝내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하멜이 태풍을 만났을 때 표착한 경로는 진도를 거쳐 제주도 대야수포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의 「고운당필기」에 의하면, 하멜 일행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아리송하자 "제주목사 이원진이 이를 조정에 아뢰자 비변사가 역관(통역사) 박연을 보내 심리하게 했다. 박연 역시 서양 사람으로 10여 년 전에 표류해 와서 훈국(훈련도감)에 소속됐는데, 본명인 호탄만을 박연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네덜란드의 박연
네덜란드 호린헴(한국에선 고린헴으로 표기)시에 사설 하멜박물관이 있다. 이곳 2층 한국방에는 박연의 패널 전시가 마련돼 있는데 패널에는 박연의 라이프 스토리와 네덜란드 회화, 박연의 초상 조각 사진과 제작자인 조각가 정보가 게재돼 있다. 박연(얀 얀센 벨테브레)의 고향 네덜란드 흐라프트-드레이프시의 의뢰로 여성 조각가 쿤스테나레스 엘리 발투스가 만든 박연 동상이 드레이프시에 있으며, 매년 8월 26일이면 드레이프시에서는 박연의 날 기념 행사가 열어 한국 네덜란드 대사와 네덜란드 거주 한국인, 한국전쟁 참전용사 등 네덜란드 다른 도시의 기관들이 참석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