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무게
[책 읽어주는 남자] 크리스토퍼 화이트 「렘브란트 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
언젠가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을 오랜 시간 감상한 적이 있다. 렘브란트의 대표작이자 불멸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외견상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네덜란드의 시민민병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렘브란트 말년의 쓸쓸하고 궁핍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렘브란트는 빛에서 어둠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작가였다. 빛이 화려할수록 영혼의 빛은 흐려진다고 생각하면서 어둠을 표현해 내기 위해 밤에만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빛이 남기는 어둠은 한 장의 거대한 여백이 된다. 인간은 항상 빛을 좇으면서 어둠은 쉽게 지나치지만, 빛과 대조되는 그림자와 어둠이라는 여백만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여백, 어둠, 그림자, 이런 단어들은 비현시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들의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여백은 무언가를 쓰고 남은 빈 공간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여백은 일정한 용도로 쓰고 남은 나머지를 자투리라는 이름으로 비하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자투리는 때로는 우리의 삶에서 여백 혹은 여유라는 소중한 의미로 재생된다.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지만, 앞으로 채워질 내용을 생략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지속성이 약속된 비워진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여백은 이미 표현된 형상보다 앞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더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좀처럼 그 모습을 함부로 모두 들어내지 않는다. 또한 어느 분야에서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꿈이라든가 희망, 행복을 어떻게 물질로만 치환할 수 있는가? 그림자와 여백으로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가치를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주변의 틈새, 비워진 공간이 가진 분명한 존재감으로 남는 것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적절한 여백은 적절한 채움의 다른 표현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덧셈을 할 때보다 뺄셈을 할 때가 더욱 힘들고 어렵다.
나에게 여백은 늘 불안한 공간을 의미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써서 채워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의 여백, 관계 속의 여백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백은 늘 온전하지 못한 불안정한 곳이라고 여겼다. 여백은 버려진 공간이 아니다. 쓸모없는 공간이 아니다. 비어 있음으로 해서 사유와 명상이 가능한 곳이다.
자투리가 없고 모든 것이 가득하게 채워져만 있으면 이 세상은 지나치게 완벽하고 몰인정한 곳이 된다. 여백이 주는 여유로움의 공간은 때로 인생과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적당한 여백은 적당한 채움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보태기를 할 때보다 비우기를 할 때, 인생과 세상에 대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여백을 바라보면 앞으로의 삶에 남은 가능성을 생각하며 고맙기도 하고 삶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나에게 삶의 여유가 생긴 것인가. 조금 더 느긋한 시각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인생을 생각한다. 숲길을 걸으면서도 '아, 여기 이런 꽃이 피었네' '오늘 우는 새 울음소리는 더욱 즐겁게 들리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면 인생도 사람도 올바르게 볼 수 없다. 여백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여유가 있어야 계절마다 다시 피는 나무와 꽃, 오고 가는 사람들이 표정, 스쳐가는 바람의 느낌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들에 대해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 된다. 이로 인해 여백의 이유와 무게가 생긴다.
렘브란트가 '빛과 어둠의 화가'로 불리는 것은 빛 속에서 어둠을, 어둠 속에서 빛의 여백을 통해 숭고한 인간애를 표현하고자 한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빛을 좇지만 렘브란트에게는 빛 뒤에 가리워진 어둠은 거대한 여백이지 않을까 싶다. 이 세상과 존재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어둠이라는 여백만큼 중요한 수단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