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와 뒤섞인 채 수십 년"…제주4·3 행불인 유해 '어쩌나'

[제주4·3 행불인 유해는 어디에] 4. 경산 코발트 광산

2024-11-24     양경익 기자

 

1950년 3500명 희생 추정…대구형무소 수감 도민 162명 포함
총살되거나 기름에 태워지기도…2001년부터 발굴 410구 발견
2008년 중단 지난해 가까스로 재개…다만 과제 산적 해결 시급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 광산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30년대 채광을 시작한 한반도 내 대표적인 식민 수탈지로 1944년 폐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1950년 6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코발트 광산 지하 갱도 등에서 일어났다. 희생자들은 보도연맹원 1000명과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명 등 3500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4·3 희생자 역시 대구형무소로 끌려가면서 학살당했다. 이 가운데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4·3 희생자 수는 162명으로 알려졌다. 이들 유해는 현재까지도 어두운 갱도 안에서 토사와 뒤섞인 채 수십 년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유족·목격자 증언 잇따라

올해 경산 코발트 광산 유족회(이사장 나정태)는 '경산 코발트 광산 구술 증언집'을 펴냈다. 이는 경산 코발트 광산 유족과 목격자의 증언을 엮은 것으로 당시 상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실제 구술 증언집과 진화위 증언자료 등에 따르면 대부분 민간인 신분이었던 보도연맹원들은 교육을 명분으로 예비검속돼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갔다.

게다가 형무소 수감자들 역시 군·경에 인계된 뒤 군용트럭에 태워져 이곳까지 끌려와 학살당했다. 형무소 수감자 중에는 제주4·3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도민들도 다수 포함됐다.

당시 한 주민은 "하루에 군용트럭 10여대씩 한 달간 계속 실려왔다"며 "트럭이 지나가고 몇 시간 후에는 총소리가 들려왔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유족은 "가족이 경찰에 연행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며 "정당한 재판절차를 받지 못하고 행방불명됐다"고 말했다.

해당 증언을 종합해 보면 희생자는 포승줄로 묶인 채 군용트럭으로 끌려 와 수직갱도 입구에 나란히 세워진 뒤 총살되거나 산 채로 수장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부는 흉기로, 일부는 기름에 태워지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과정에서 76㎜ 고폭탄 폭약까지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문이 사실로

이 같은 증언은 수백구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앞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모두 3차·6차례에 걸쳐 유해 발굴 사업이 추진되면서다.

이 가운데 1, 2, 3차례는 민간 차원에서 이뤄졌으며 4, 5, 6차례는 국가 차원에서 각각 진행됐다.

우선 1차 발굴 당시 막혀있던 수평 2굴이 30년 만에 개방됐다. 갱도 입구에는 20㎝ 정도 물이 차 있었고 30여m를 지나자 유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습된 유골은 모두 30구로 이 가운데 온전한 뼈는 170여점에 불과하다. 그렇게 인근 대원골 일대 학살 현장을 포함해 모두 410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특히 여기에서 발견된 유해는 총상흔, 둔기에 의한 외상흔 및 화염흔 등이 감정되기도 했다. 주민 등 목격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다만 2008년 8월 3차 발굴 조사 당시 마무리되지 못하고 갱도 내 유해와 뒤섞여 있던 토사를 마대에 담아 보관됐다. 보관된 분량은 15㎏ 기준 약 4000포대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에 지난해 4월 4차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3차 발굴 조사 이후 15년만으로 토사를 반출하고 유해를 분류하는 등 270구(추정)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는 상태다.

이와 함께 고무신과 허리띠, 단추 등 유류품과 탄피, 탄두 등 군용 용품도 확인되면서 당시 상황을 가늠케 했다.

 

△유해 발굴 사업 한계

이처럼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가운데 과제는 산적하다.

세부적으로 폐광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2008년 발굴 당시 수직갱도와 수평갱도 등이 1차적으로 파악됐지만 정확한 구조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제1수직갱도는 193.8m, 제1수평갱도는 165.0m, 제2수평갱도는 143.3m 등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마저도 수평1, 2굴과 수직 1, 2굴이 위치한 지역은 사유지로 지정되면서 유해 발굴 사업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학살 현장에 대한 훼손 등도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2008년 발굴 당시 예산 등의 문제로 중단됐고 임시방편으로 갱도 내 유해를 보관한 만큼 토사와 암석에 대한 조사는 물론 지자체의 관심도 시급하다.

이와 함께 추가 발굴 조사를 위한 갱도 내 안전 보강 시설 확충이 요구되고 있다. 갱도 내는 협소하고 오랜 시간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발굴 도중 안전상 문제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양경익 기자

"유해 발굴 관심·지원 필요 후대 전승 중요"

 

인터뷰/나정태 경산 코발트 광산 유족회 이사장

"과거사 해결을 위해 교육 등 후대 전승이 중요한 만큼 유해 발굴 사업에 대한 노력과 관심이 절실하다"

나정태 경산 코발트 광산 유족회 이사장은 현재 제주4·3 희생자를 포함해 한국전쟁 직후 민간인 집단 학살이 자행된 경산 코발트 광산 유해 발굴 사업에 대한 과제를 이처럼 던졌다.

나정태 이사장은 "증언을 종합해 볼 때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만 35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며 "하지만 아직도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강조했다.

특히 "연좌제 등 불이익을 우려하기 때문에 유족들은 신청이 저조한 실정"이라며 "이는 관심이 중요한데 진실이 규명될 경우 과거사 해결을 위한 교육도 동시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실제 유족들의 바람은 한 유해라도 발굴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경산 코발트 광산은 제주4·3 희생자를 포함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했지만 타 지역 학살지와는 다르게 지리적으로 갱도이다 보니 유해 발굴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더해 DNA 채취도 한 사람당 300~500만원 하는데 국가 예산으로는 부족해 유전자 채취마저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며 "진화위에 대한 희생자 선정 역시 까다롭다 보니 고령의 유족 입장에서는 쉽지 않기 때문에 지원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양경익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