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양도 혹은 우도로 온 고구마, '고금마'에서 '감제'로 

김유정의 제주도 20. 고구마 <1>

2025-01-07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자연재난의 식량부족 대비해야 
멕시코에서 제주까지 온 작물
제주흙 성질이 대마도와 닮아

△자원으로서의 식량 

조선시대에 고구마는 구황식물로 제일가는 곡물이었다. 그만큼 고구마가 척박한 땅에 잘 자라고, 수확량도 많아 구휼에 좋은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구황(救荒)이란 흉년 때 굶주린 사람들을 구해준다는 뜻이다. 요즈음에는 '굶어 죽는다'라는 말을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굶주림은 옛날일 만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에도 어쩌면 우리는 더욱 위험하게 식량부족에 노출돼 있다. 전쟁, 이상기후, 자연재해, 전염병 등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굶주림이라는 생각지도 못할 재난을 몰고 올 것이다. 도덕이나 예의, 멋 부림도 기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어느 것보다도 생계가 우선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무서운 배고픔을 막지는 못한다. 

제주인들은 고립된 섬이라는 특성과 화산섬이라는 돌 많은 땅에서 살려고하니 자연히 생존 본능이 뛰어나 'ᄌᆞ냥'이라는 생활습성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쪼잔하다거나,  급기야 좁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삶은 매우 정직한 것이다.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보릿고개를 넘었던 부모 세대의 마음을 지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돌 위의 마련된 땅은 가뭄에 취약했고. 태풍이 길목이어서 비바람의 피해가 극심하여 나날이 생존에 대한 염려를 떨칠 수가 없었던 그들의 삶을 말이다. 다 알다시피 경제적 생산력의 취약함은 생활의 궁색함을 낳았고, 무엇이고 늘 부족한 현실은 절망에 이르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근에 이르게 하는 어떤 명분의 전쟁도 끝까지 반대해야 하며, 늘 자연재해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낮은 나라다. 쌀은 비교적 많이 생산되지만, 밀과 옥수수, 콩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곡물의 분포를 보면, 아시아가 쌀이라면 유럽과 미국은 콩과 밀이고, 라틴아메리카는 옥수수가 주요 곡물의 산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곡물들은 대개 글로벌 체제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며, 그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고 수출입 물량이 확정된다. 물론 식량 문제는 일차적으로 돈이 있어야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식량은 자국 우선 정책으로 전환하여 돈이 있어도 식량 수입이 제한되므로 식량자급률이 낮은 나라들은 가장 먼저 큰 위험에 노출된다. 오늘날 기후변화에 의한 자연 재난, 영토와 자원 탐욕으로 일어나는 전쟁, 각종 전염병의 급습은 언제라도 식량 위기를 가져다주는 위험한 요인이 되고 있다. 

사실상 세계 현실은 불안한 살얼음판과 같다. 늘어나는 지구 인구, 오랜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아마존,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형 산불, 중국, 라틴아메리카 등 각국의 홍수, 세계 전역에 걸친 화산폭발, 해일, 태풍 등 그야말로 재난이 종합세트가 돼 모든 식량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 UN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2019년 말 기준 약 1억 3천만 명이었던 기아 인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 사태 이후에 2억6000만명이라는 수치로 늘어날 것을 예상했다. 

△고구마 전파의 길 

고구마는 감저(甘藷)라고도 하며, 조언이 들여온 고구마라고 하여 조저(趙藷)라고도 한다. 고구마는 열대지방에서 온 작물로써 나팔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뿌리식물 채소이며, 줄기는 약 3m가량 계속 벋어가면서 중간마다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커져 타원형의 알갱이를 여러 개 키워낸다. 줄기는 붉은색이며 자르면 흰색의 유즙이 나온다. 꽃은 7~8월에 분홍색의 나팔꽃 모양으로 피고, 온대지방에서는 가을에 접어들어 꽃이 피고, 초겨울에 줄기가 시들어버려 1년생 작물로 취급된다. 맛은 달고 속살은 노르스름하고 매우 부드럽다. 먹으면 포만감이 있어 식량으로도 충분하다. 고구마 줄기는 돌담에 걸쳐 잘 말려서 눌을 눌었다가 마소의 사료로 쓰기도 하고 땔감으로도 사용했다. 

고구마의 학명은 Ipomoea batatas Lam.  영어 이름으로는 Sweet potato이다. 원산지는 Ipomoea 속 식물 400종 중 200종이 열대 아메리카에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멕시코에서 과테말라에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마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당시 스페인에 전파되었고, 그 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서 말레이군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는 16세기 신대륙과 왕복하는 노예선의 식량으로 쓰이면서 아프리카 서해안에 전해져 아프리카의 주식으로 널리 재배되었다. 인도에는 16세기에 전파되었고, 중국은 1584년 복건성에 처음 도입되었다고 한다. 1605년 고구마는 복주(福州)로부터 류큐(琉球)에 들여와 가고시마, 쓰시마 등지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763년(영조 39)에 견일통신정사(遣日通信正使) 조엄(1719~1777)이 일본 가는 길에 쓰시마 사스 나포(左須奈浦)에서 고구마의 보관법과 재배법을 익혀 최초로 우리나라 부산으로 고구마종자를 전파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구황작물로 활용하도록 했다(吳現道, 1996).

조엄의 고구마 식생에 관한 기록이 「해사일기」에 사실적으로 나온다. "(……) 이 섬(쓰시마)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어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부른다. 왜음(倭音)으로는 '고귀마(古貴麻)'라 하는데 이것은 생김새가 산약(山藥)과 같고 무뿌리[菁根]와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그 잎은 산약 잎사귀 비슷하면서 그보다는 조금 크고 두터우며 조금 붉은색을 띠었다. 넌출 역시 산약 넌출만 한데 그 맛이 산약에 비해 조금 강하고 실로 진기가 있으며 반쯤 구운 밤맛과도 같았다.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였다. 듣건대, 이는 남경(南京)에서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의 육지와 여러 섬에 많이 있다는데, 그중에서도 대마도(對馬島)가 더욱 많다고 하였다. 그 심는 법은 봄에 양지바른 곳에 심었다가 넌출이 땅 위로 올라와 조금 자라면 넌출의 한두 마디를 잘라 땅에 붙여 흙을 덮어 주면 그 묻힌 곳에서 알이 달리게 되는데, 알의 크기는 그 토질의 맞고 안 맞음에 달렸다. 잎이 떨어지고 가을이 깊어지면 뿌리를 캐서 구덩이를 조금 깊이 파고 감저를 한 층 펴고 흙을 두어 치 덮고 다시 감저를 한 층 펴고 또 흙을 덮어 다지고 이렇게 하기를 5~6층 한 뒤에 짚을 두텁게 쌓아 그 위를 덮어 비바람을 막아 주면 썩지 않는다. 또 봄이 되면 다시 위와 같이 심는다고 한다.

지난해 사스나포(左須奈浦)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감저를 보고 두어 말을 구해서 부산진으로 보내어 종자로 삼게 하였는데, 돌아가는 지금에 또 이것을 구해서 장차 동래(東萊)의 교리배(校吏輩)들에게 줄 예정이다. 일행 중에서도 그것을 얻은 자가 있으니 이것들을 과연 다 살려서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리기를 문익점(文益漸)이 목화를 퍼뜨린 듯하다면 어찌 우리 백성에게 큰 도움이 아니겠는가. 또 동래에 심은 것이 만약 넌출을 잘 뻗는다면 제주 및 다른 섬에 재배함이 마땅할 듯하다. 듣건대, 제주의 토성(土性)은 대마도와 많이 닮은 듯하다고 하니 그 감저가 과연 잘 번성한다면, 제주도민이 해마다 손을 벌리는 것과 나창(羅倉:나리포창)의 배를 띄워 곡식을 운반하는 폐단을 거의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토질이 맞는지 아직 확실하지 못하고 토산(土産)이 다 다르니 과연 그 번식이 뜻대로 될지 어찌 기필(期必:확신)하겠는가."

△제주도에 온 고구마

제주도에 고구마가 언제 재배되었을까. 먼저 두 가지 전파설을 소개하면, 1905년 아오야기 츠나타로오(靑柳網太郞)는 "3~4년전(1901년)에 비양도에 거류하는 나가사키현으로부터 다량의 고구마 종자를 구입해와 제주도민에게 그 재배법을 가르치면서 전도에 전파되었는데 작년(1904)에는 비양도와 가파도의 2~3개소에서 4~5만근 정도 수확하여 성안으로 상당량을 수송했으며, 도민의 일상식량으로 널리 쓰고 있다(靑柳網太郞, 1998)"라고 했다.

또한 1939년 다카하시 노보루(高橋 昇)의 고구마 제주도 전파설을 보면, "고구마는 처음 완도군 고금도로부터 우도로 들어왔고, 또 별방(別防:하도리)에서 재배해서 점차 동·서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80여 년 전 우도의 고모 씨가 어업관계로 고금도에 왕래하면서 씨고구마를 갖고 와 가까운 이웃에게 보급했고, 또 이웃의 하도리와 배로 오가는 관계로말미암아 온 섬에 보급된 것이다. 감저를 20년전까지 '고금마'라고 하다가 지금은 '감제'라고 한다. '고금'은 섬이름, 마는 '토란'이라는 뜻으로 맛이 토란과 비슷한 데에서 명명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육지에는 길면서 붉은 고구마인데, 재래 고구마는 거의 원래의 종자로써 담홍색이며, 살은 약간 누런색을 띠고 둥글면서 단맛이 강하다(高橋 昇, 2000)"라고 하여 19세기 후반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