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 오고 가는 사람들 기쁨과 슬픔 가득한 이별 장소

김유정의 제주도 23. 화북포

2025-02-04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계절 따라 다른 육지 가는 뱃길 
포구 선창은 원래 성창 일컬어
화북포 영송정 1841년 폐지

△별도포를 오가는 사연

화북포는 이전에 별도포로 불렀다. 조천포와 더불어 조선시대 제주 최고의 관문 중 하나였다. 1450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별도 봉화'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별도가 화북의 옛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별도포는 조선시대 조천포와 더불어 전라남도 해남, 영암, 강진을 잇는 항로로 육지와 직선거리로 가까워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별도포라는 말은 금남 최부(1454~1504)의 「표해록」에도 나온다. 당시 추쇄경차관 최부는 1486년(성종 17) 11월 11일 새로 부임하는 제주목사 허희(재임기간 1487~1490)와 함께 해남 관두량에서 배를 타고 11월 12일 제주 조천관에 도착했다. 최부는 임무 수행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급히 수정사 지자 스님의 단단하고 빠른 배를 빌려 1488년 별도포 후풍관에서 1월 3일 떠났다가 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 중국 강남으로 표착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조선 초기에 화북포는 제주성까지 10여리(약 4㎞)에 불과한 근접거리였겠지만 수전소가 없는 무방비 상태의 포구였다. 급기야 화북포는 왜구들이 침략한 상륙지점이 됐다. 1555년(명종 10) 왜구들은 6월 전라도를 60~70척의 배로, 장흥, 강진, 장흥, 진도 등 8진을 함락시키고 노략질하다가 조선군 토벌대의 역공을 당했고, 퇴각하던 왜구의 배 40여 척이 보길도에서 바로 제주 앞바다 1리 거리까지 가까이에 정박했다. 마침내 왜구들은 동년 6월 27일 화북포로 상륙해 제주성을 3일 동안 포위해 제주성이 함락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이를 을묘왜변이라고 한다.

△뱃길의 이용 

한번 놀란 가슴은 진정하기 어렵다. 을묘왜변(1555) 이후부터 사선이 마음대로 드나들자 섬 안에서 부역을 피하는 자들이 가끔 배를 타고 도망했다. 그 때문에 조천, 별도 두 포구에서만 배를 출항하도록 허락했다. 출항하는 날에는 목사 휘하 군관 한 사람이 배 타는 사람들의 출선기를 작성해 장부와 대조하며 사람과 물류를 점검했다.

이런 조치는 1555년 을묘왜변에 대한 공포의 여파였다. 

백호 임제의 저서 「남명소승」에, 1578년(선조 11) 2월 16일 기록에 호남 원병들이 매년 3월에 별도포로 입도해 수자리를 서다가 8월이면 조천관에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청음 김상헌의 「남사록」에, 1601년 10월 12일, 별도포에서 전선과 병기들을 점검했다. 김상헌은 '별도포는 조천관과 더불어 육지와 왕래하는 배들이 북풍을 만나면 돌아오고, 동풍을 만나면 출항한다'라고 하면서, 원래 '별도포 포구에 후풍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라고 기록했다. 또 항로에 대해서도, "바람을 기다리기 위한 정해진 장소가 없어 동쪽에서는 별도포나 어등포, 또는 조천관에서 동풍을 만나 육지로 향하게 되면 백도, 강진, 관두량, 해남, 진도 등지에서 정박하게 되고, 서쪽에서는 도근천이나 애월포에서 서풍을 만나 육지로 향하게 되면, 어란포, 영암, 관두량, 진도, 초도 등지에 정박하게 된다."라고 전한다.

사실 조선후기에는 포구를 어떻게 이용했을까. 여름과 가을에는 동남풍이나 남풍이 불면 배들은 제주목관아와 가까운 산지포나 화북포를 이용했고, 늦가을과 겨울에는 서북풍이나 북풍이 불어오면 조천포를 이용했다. 이는 파도를 막는 지형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화북포는 김정 목사가 방파제를 쌓은 이후로 늦가을과 초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김익수, 2017). 

1653년 화북포는 수전소를 두어 '판옥전선 3척과 비축 군량 6섬, 곁꾼 180명, 사수와 포수 87명을 주둔시키면서 군사적인 요충지가 됐다. 화북포가 성창에 병선과 사선을 분리해 주둔지에는 출입을 금지한다는 의미로써 '금돈지' 라는 말의 유래가 된듯하다. 제주도의 포구들은 바닥에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 대신 제주에 적합한 배로 바꿔야 한다는 개혁론이 제기됐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1679년(숙종 5)에 제주안핵겸순무어사 이증(1628~1686)은 제주목사 최관이 전 제주목사 윤창형(재임 1676~1678)과 정의현감 상인첨을 탐욕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치계를 올리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12월 6일 강진의 부소문에서 아침에 출발해 백도에 정박했고, 다시 12월 7일 아침 백도를 출발해 같은 날 저녁 화북방호소에 도착했다. 이증은 화북포에 대해, "배 정박소는 조천 바닷가에 미치지 못하지만 포구가 한라산 북쪽에 있어서 바로 육지로 드나드는 직선 길이다. 포구의 인가는 50호이고 포구 남자 과반이 다만 새로 설치된 진(鎭)의 군병들이고 무기가 모자라 제주목관아에서 가져다 지급했다"고 당시의 화북포 상태를 전하고 있다. 1680년 이증은 제주에서 업무를 마치고, 바람을 기다리며 화북포에 묵은 것은 3월 25일에서 4월 3일까지 9일 동안 머무르다 비로소 4월 4일 오전 9시8일만에 화북소를 떠났다.  

1694년 5월 21일 제주목사 이익태도 해남 해창 뱃머리를 출발, 28일 아침 서안도를 출발해, 저녁 사소도 바다를 거쳐 29일 아침 8시쯤에 화북소로 입도했다. 

1703년 김남길이 그린 「탐라순력도」 「화북성조(禾北城操)」에는 별도포에 8척의 배가 정박해 있고, 두 곳의 성창이 그려져 있다. 성창은 화북진성에 소속된 수전소의 병선을 보관하는 곳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후에 선창이라는 말로 바뀌면서 일반적인 포구를 일컫는 말이 됐다. 화북성을 지키는 군사는 172명이고, 지휘관은 조방장 이희지였다. 그림에는 남쪽에 별도포리가 있고, 비각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화북 비석거리를 표시한 것으로 보이며 동쪽에 별도연대가 보인다. 

△돌짐을 날라 쌓은 방파제, 과로로 숨진 목사 

화북포는 옛날에 쌓았던 방파제가 무너지면서 포구가 좁고 오가는 배들의 움직임이 불편했다. 1737년(영조 13) 목사 김정(1670~1737)은 화북포를 복구·확장할 생각으로, 돌 쌓는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 돌을 깨고 운반해서 포구를 쌓았으나 허망하게 하룻밤 사이 파도에 무너졌지만, 김정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쌓아 완성했다. 그러나 김정은 화북포 축항 공사를 할 때 "목사가 돌짐을 져 날랐다"라는 전설의 주인공이지만 축항 공사를 완공한 후 임기를 마쳤지만 제주를 떠나지도 못하고, 1737년 9월 화북포 객사에서 중풍으로 쓰러져 68세의 나이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죽음과 맞바꾼 화북포 공사가 완공되자 이곳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포구 위에 영송정을 지었으니 공사선을 점검하는 처소로 삼으면서 화북포는 자연히 환영과 이별의 장소가 됐다. 목사 김정이 몸소 독려하면서 쌓은 방파제 규모는 길이 210척(약 65m, 영조척은 목공척이라고도 하는데 약 31㎝정도이다) 너비 21척(약 6.5m), 높이 13척(약 4m)이었다. 영송정은 1841년 폐지됐다. 

김정은 작명가처럼 산지천의 조천석을 세운 바위인 지주암을 비롯해 삼사석, 달관대, 광제교, 세심단, 천농석, 중장병, 용린병, 호반병, 급고천, 감액천, 판서정 등 많은 이름을 지었다. 또 김정을 기리는 비석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인 것은, 외도동 월대에 사상김공정휼민청덕공덕비와 화북포 해신사 옆에 '목사 김공정공덕비가 귀부 위에 세워져 있으나 염분에 마모돼 버렸다.  

화북포로 온 대표적인 유배인은 추사 김정희이다. 추사는 1840년 7월에 10년 전 윤상도 옥사 사건이 대사헌 김홍근에 의해 다시 거론되면서 아버지는 삭탈관직으로 타계했고, 추사는 모진 고문 후에 친구의 구명으로 감형받아, 9월 7일 한양에서 제주도 유배길에 올라 같은 달 27일 전라도 이진 포구에서 배를 타니 10시간 만에 화북포에 이르러 민가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화북포구는 조선시대에 수많은 사연을 안고 오가는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한 이별의 장소다. 포구에선 기쁨도 잠시 파도는 우리를 기약 없는 시간의 나그네로 만들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