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미학

[책 읽어주는 남자] 엠마뉘엘 수녀 「풍요로운 가난」

2025-03-03     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당신은 누구세요?" 제비가 물었다.
"행복한 왕자란다."
"행복한 왕자님이 왜 울고 계세요?"
"난 살아 있을 때 눈물 같은 건 흘린 적 없었단다. 하지만 이렇게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니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구나."

아일랜드의 작가이며 극작인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동화 「행복한 왕자」에서 제비와 왕자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 동화를 처음 읽었을 때, 울고 있는 그가 왜 '행복한 왕자'라고 불리는지 그 역설적 의미에 궁금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나 황금을 지닌 부자는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와일드의 작품은 보여준다. 

그 옛날에는 적게 소유하며 가난한 삶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에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가난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몸서리칠 만큼 춥고 배고팠던 삶을 살아갔고, 너나 할 것없이 보릿고개를 지나며 가난하고 헐벗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흰 쌀밥과 고깃국은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만 있었고 달걀은 할아버지 밥상에만 올려놓던 시절이었다. 동화책도 쉽게 읽을 수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던 몽매하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아름다웠다. 날고구마 깎아 먹는 것이 즐거웠고 밤톨 주우러 산에 올라가는 일이 즐거웠다. 아궁이에 감자 구워 먹는 일이 즐거웠고 딱지치기하던 일이 신바람 났다. 한겨울 빙판으로 변한 언덕에서 수수깡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던 일마저 끼니때를 잊을 만큼 재미있었다. 한결같이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가난이 미덕은 아니지만 부유함을 모르던 시절에는 가난이 낯익고 정다울 때였다.

오늘날같이 모든 면에서 물질 만능으로만 치닫는 세상에서는 인간다운 세상이나 인심은 사라지고 자꾸만 비인간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웠던 날들을 회상하며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가난해도 당당할 수 있고, 부유하더라도 가난의 미덕을 깊이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서 그런 심성이 갈수록 사라져 가고 있다. 부의 위세에 현혹되어 가난했던 날의 아름다움과 여유로움을 금세 외면하고 만다. 부유한 사람들만이 삶의 모두를 이룬 듯이 보이지만 그들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하다"라는 말이 있지만, 부유함이 반드시 행복과 상관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가 1인당 국민소득 최하위권 국가인 방글라데시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집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지 못하다는 법칙은 없다. 

엠마뉘엘 수녀의 「풍요로운 가난」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908년 벨기에 브뤼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스무살에 수녀가 되고, 이집트, 터키 등지에서 수녀로 일하다 62세에 은퇴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은 삶을 바치기로 하고 카이로의 빈민가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넝마주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카이로의 넝마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책은 가난의 현실적 측면과 정의,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가난의 풍요로움'을 정의하고, 가난과 부의 차이에 대해서 구분 짓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난의 개념이 아닌, 그녀만의 새로운 '가난'을 말해준다. 

행복의 길이 열리는 것은 '헐벗음'을 통해서라고 강조한 저자는 소유의 가난 속에서 존재의 부유함으로 넘어가는 풍요로운 가난을 느끼길 바란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해 지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진정한 행복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나'라는 존재에만 너무 집중하고 몰입하는 삶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소유하고, 그 소유욕이 결국 행복하지 못한 인간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때로 우리는 가난을 선택함으로 인해 소유에서 자유로워지고, 부의 불공평한 분배가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행복한 왕자의 마음을 알았던 제비처럼, 궁핍한 자들과 함께하면서 삶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 엠마뉘엘 수녀처럼, 우리의 마음을 부자로 만드는 것이 반드시 물질적 풍요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