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녀 좀기다에서 비롯, 물질은 조물다·숨비다와 같은 말

김유정의 제주도 26. 잠녀와 해녀의 용어 <1>

2025-03-04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조망먹다 밥을 물에 말다 
좀녀질은 비하된 직업표현 
잠녀의 전복 관리들 표적 

△좀녀(潛女)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 

좀녀는 물 속에 들어가 전복이나 소라, 성게, 미역 등의 해산물을 따는 여인을 말한다. 중세어 발음으로는 좀녀이고 한자어로는 잠녀(潛女)이고, 제주식 발음으로는 '좀녜'가 된다. 좀녀, 잠녀, 좀녜, 좀수 모두 바다에서 잠수하는 같은 여인을 말한다. 잠녀는 바닷물에 잠겨서 해산물을 따는 작업을 한다, 좀녀의 어원을 보면, 좀기다+여인의 합성어이다. 좀기다(潛·沈)의 어원으로 '좀다'가 있다. '좀다'는 고어(古語)로 '좀기다'이며, 현대어의 '잠기다(潛)'가 되었다. '좀다'는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밥을 국에 말아 먹는 행위로도 나타난다. 밥을 말아먹는 행위를 '밥 조망먹는다'라고 한다. 조망먹는 것이 국물에 밥을 잠기게 하여 먹는 것으로 보아, 어떤 대상이 물에 잠기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물에 잠겨서 해산물을 따는 일을 '물질'이라고 하며, 좀녀들은 이를 '조물다'라고 한다. '조물다'는 물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건져내는 것이다. 한 표현의 예를 들어보겟다. "요작이 바당 쌔신디 어디 강 조물안디야. 본본헌디 이서냐(엊그제 파도가 높았는데 어느 곳에 가서 물질했니. 잔잔한 곳 있었니?)" 

좀녀의 일은 매우 위험하고 힘들다. 해류와 조류에 의한 물살과 파도의 영향으로 몸을 가누는 어려움이 많고, 상어나 돌고래의 직접적인 위협, 수심과 수압에 따른 호흡조절과 곤란, 수온에 의한 저체온증 등의 위험이 상존한다. 그래서 좀녀의 물질은 험한 일이어서 '좀녀질'이라고 천한 일로 여겼다. 좀녀질이 그렇듯 '~질'은 명사 뒤에 붙는 접미사로 좋지 않은 행실을 나타낼 때 쓰여서 주먹질, 도둑질, 계집질과 같이 매우 부정적인 행위를 말하며, 또 특정한 직업이나 노릇을 나타내는 말로 좀녀질, 목수질, 훈장질 등과 같이 비꼬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물질의 다른 표현으로 '조물다' 외에 '숨비다'라는 말이 있다. '숨비다'는 물속에서 '곤작'사서 물 아래로 들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곤작'사는 것은 머리를 물 아래로 향하게 하고 두 다리를 위로 올려서 힘차게 재빨리 자맥질하면 몸의 무게 중심이 아래로 쏠려 순식간에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숨비는 것'은 '물질하다'와 같은 행동이다. "비바리적 홀에미섬에 멫번 숨비러 갔다오란?(처녀 적에 과부섬에 몇 번 물질하러 갔다왔니?). 숨비는 일은 좀녀가 물속에 들어가 약 1~2분 정도 숨(호흡)을 참기 때문에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빨리 뱉으면 물 묻은 입을 벌릴 때 입술이 병목현상이 돼 스치는 휘파람 소리나는 것을 일명 '숨비소리'라고 한다. 급히 찬 숨을 비우는 소리인 것이다. 

단어나 용어의 개념을 정의할 때 그 단어가 현실에서 어떤 행위로 나타나는 지가 그 언어의 본질에 더 가까울 것이다. 

정리하면 '좀녀' 는 잠기는(潛) 행위를 말하는 동사와 여인(女)이라는 인칭명사가 결합된 말인데 이 어원의 기원과 연관된 표현으로는 "1. 조물다: 물속에 있는 어떤 대상을 건져내다. 2. 좀다:좀기다(沈), 잠기다(潛), 3. 숨비다: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다"가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좀녀의 물질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좀녀의 어원이 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좀녀는'조무는 여인', '잠기는 여인', '숨비는 여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좀녀(잠녀)는 여인이 물에 들어가 몸을 거꾸로 하여 숨을 참아 아래로 내려가 해산물을 딴 후 다시 올라와 숨을 뱉는 바닷일을 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물질이라고 한다. 어원에서 보듯이 좀녀가 매우 특수한 이유는 오로지 물속에서 몸을 띄우고 일하기 때문이다.       

△좀녀 용어의 역사 

그렇다면 좀녀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잠녀라는 용어가 처음 나오는 문헌은 제주 유배인이었던 규창 이건의 「제주풍토기」(1629)이다. "천한 것은 미역을 캐는 여자로서 잠녀라고 부른다." 유교에 경도된 이건의 눈에 비친 잠녀는 벗은 몸으로 남녀가 서로 엉켜서 일하는 모습이 괴이했고, 부끄러운 일인 줄 모르는 행동으로 보였다. 양반의 눈으로 물소중이를 입은 모습도 처음 보기도 했거니와 왜 그런 옷을 입었는지 알리도 없었다. 이건의 눈에는 '알몸을 드러낸 채(赤身露體)' 미역을 캐는 천한 여자가 잠녀였다. 

제주목사 이익태는 1694년 7월~1696년 9월까지 햇수로 3년간 제주에서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의 저서 「지영록」(1696)에 보면, 당시의 제주 현실은 진상하는 전복이 모자라서 제주 목사로서 고민이 깊었었다. 이익태는 고심 끝에 미역 따는 잠녀 중에서 새로 선발하여 전복 따는 잠녀로 역할을 바꿔 겨우 전복 진상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익숙치 못하다고 어려움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미역 캐는 일보다 전복 따는 일이 어려워 잠녀들의 괴로움의 차이가 매우 다르다."고 했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1703년에 그린 「탐라순력도」 「병담범주」에 '潛女'라는 한자 표기와 함께 다섯 명의 잠녀가 물질하는 광경을 그림으로써 최초의 제주 풍속화가 되었다. 또한 이형상의「제주민폐장」에는 '이 섬의 풍속은 남자가 전복을 채취하지 않고, 그 책임이 잠녀에게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포작인의 역할이 잠녀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아비는 포작(鮑作)에 곁꾼 노릇을 하고 있고, 부인은 잠녀로서 1년에 바쳐야 할 미역과 전복 때문에 그 고역이 말테우리보다 열 배나 됩니다"라고 하여 이형상은 잠녀의 비참한 처지를 지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숙종 28년(1702) 기록에 '곁꾼의 아내를 잠녀'라고 하여, "1년에 관에 바치는 세금이 포작은 20필, 잠녀는 7~8필이라고 하여 부부가 바치는 세금이 연간 30필에 이른다."라고 하여 이형상의 장계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유배인 북헌 김춘택(1670~1717)은 제주에 두 번 왔었다. 첫 번째는 아버지 김진구의 유배살이를 도우러 1689~1694년에 동천(東泉) 물가 적거지에서 체류했다. 두 번째는 자신마저 유배인 신분이 돼 1706~1711년까지 산지(山池)에 적거했다. 김춘택의 「북헌집」은 대부분 두 번째 제주 유배인 신분으로 왔던 6년 동안 쓴 글들이다. 그가 「잠녀설(潛女說)」에서 '이른바 잠녀라는 여인이 물에 잠겨 미역을 채취하거나 혹은 전복을 따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데 잠녀의 실상을 가까이에서 본 기록이다.  

석북 신광수는 1764년(영조40) 정월에 의금부도사가 돼 제주도에 와 45일 동안 머물면서 「잠녀가(潛女歌)」를 지었다. "탐라의 비바리들은 물질을 잘하는데 이미 10살 때부터 앞 냇가에서 헤엄을 배운다(……), 토속에 신부로는 잠녀가 제일" 이라고 써 당시 제주의 사회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제주 유배인 정헌 조정철(1751~1831)은 정조(正祖) 시해(弑害) 사건에 연루돼 1777~1782년 2월까지 제주목과 정의현에서 유배 생활 중 지은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 「탐라잡영」기 십칠 주(註)에, "잠녀는 천으로 작은 바지를 만들어서 음부를 가리는데 제주어로 소중의 라고 한다. 알몸으로 바다 속을 들고 난다"라고 하여 잠녀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다.

「승정원일기」 고종 4년 정묘(1867) 6월 3일 기사에 "양석환은 처음에는 잠녀를 빙자하여 뇌물을 거두고 끝내는 병영의 장교와 더불어 이익을 나누었으며, 기한이 지나서야 나와 갇혔으니 더욱 무엄합니다." 양석환은 잠녀에게 뇌물을 거둔 혐의로 옥에 갇혔다. 고종 4년(1867) 6월 7일 전라도 암행어사 윤자승이 서계에 보면, "앞전에 우수사를 지낸 박내명은 각 섬의 잠녀를 잡아오는데 어찌하여 대부분 아래 것들을 부려서 잡아오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현직이 아닌 전직 관리가 부하를 시켜 잠녀를 체포해 온 것의 불법과 세금을 중간에서 착복한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