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파문을 읽는 하루
베란다 창문을 열었더니 빨래 걸이에 걸어둔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강풍 예보가 있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언덕 너머의 나무들이 휘청거린다. 소나무가 저렇게 많았었나 싶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해도 바람이 부니 가지 많은 나무 가 든든해 보인다. 양쪽 가지가 고르게 균형을 이룬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도 안정감이 있다. 그렇지 못한 수형의 나무는 휘청거림의 강도가 커서 보는 이를 불안하게 한다. 이러나저러나 나무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라 걱정이 산과 같아서 입맛을 잃은 지 꽤 되었다.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게 내 돌봄의 전부이다. 밑도 끝도 없는 시름같은 것이 여러 날을 지배하고 있다. 하늘과 구름, 바람의 빛깔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하나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장 짜증스럽다. 동어반복의 뉴스도 소음에 가깝다. 손 놓고 있으면서도 마음만 부산스러운 이 기분, 빨리 깨치고 나아가고 싶다. 이런 날엔 오래된 노래나 시 한 편이 위안이 되려나.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최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ㅤㄷㅗㄺ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시 「알 수 없어요」 전문)
한용운의 시가 떠오른 건 아마 지난 주말에 본 영화 한 편 때문인 것 같다. 영화 제목은 '총을 든 스님'이다. 제목만 보아서는 저항군이 된 스님 이야기인가 싶다. 내용은 그와 반대다.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스님과 그 주변의 이야기랄까.
세상을 은유적으로 이해하는데 너무 많은 학습을 해버렸다. 돌과 구름, 이끼, 거울의 의미와 상징이 무엇일까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마치 세상을 시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현실인데 나는 시적으로 보려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이 잘 보일 리가 없다.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 전문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니 온통 빨간 글씨로 은유와 상징, 표현법의 이름 등이 잔뜩 적혀 있다. 이렇게 아직도 시를 가르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시와 가깝게 하려는 의도이긴 하지만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위 시에서 다른 건 모르겠고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에서 나의 요즘 심경을 발견한다. 누구의 밤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칠 줄 모르고 타고 있긴 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애가 타고 있는 것일까. 영화 '총을 든 스님'에 나온 큰스님처럼 명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2006년 부탄왕국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보급되었으며 국왕이 자진해서 모든 권력을 내려놓으며 국민에게 정치적 주권을 행사할 기회를 부여한다. 투표를 처음 실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부탄국민은 지금까지의 삶에 불편함을 못 느꼈기 때문에 투표가 무엇인지 왜 하는 것인지 모른다. 모의 선거가 치러지고 투료율을 높이기 위해서 당국에서 파견된 공무원은 마을주민들을 파란당, 빨간당, 노란당으로 갈라놓고 서로 증오의 마음을 배우도록 한다.
라디오로 선거 소식을 들은 우라마을의 '라마승'(켈상 최제이 역)은 제자에게 "총을 구해 오라"고 한다. 제자 '타시'(탄딘 왕축 역)는 우여곡절 끝에 총을 수소문해 온다. 그리고 보름날 마을의 제를 지낼 때 땅을 파서 총을 묻는다. 스님은 "이 탑에는 흉년이 돌 때 먹을 곡식과 전염병이 돌 때 약을 넣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장 아래의 토대에는 증오와 갈등, 고통을 상징하는 총을 묻는다"라고 말한다. 큰스님이 제자에게 총을 구해 오라고 한 이유는 그런 뜻이 있었다. 증오와 갈등, 고통을 상징하는 총을 묻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에게 평화와 우애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런 영화가 좋은 것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면서도 은유와 상징으로써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총은 살상의 도구이기 때문에 없애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 그 어떤 목적도 살상 또는 그 의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의 현실은 그와 반대로 가고 있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방어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총과 무기를 다 폐기처분 한다면, 이런 상상은 너무 동화적인가. 영화에서나 보고 역사로만 배웠던 전쟁과 학살, 계엄이 현실이 되고 나니 근원에 가까운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왜 죽이려고 하는가. 죽이지 않고 평화로울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봄이 온다고 나들이 갈 마음에 설레는 그런 호사를 누릴 만도 한데, 그런 호사를 말하기엔 시국의 바람이 너무 차다. 시 한 편으로나마 호사를 누려본다.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김용택 시 '봄날' 전문)
매서운 바람이 연일 불면서 매화꽃은 지고 벚꽃 봉오리가 벌겋다. 벚꽃이 만개할 즈음엔 내 마음에도, 이웃에도, 나라에도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란다. 꽃이 피었다고, 꽃이 졌다고 감정도 시냇물처럼 흐르는 그런 호사 한번 질펀하게 누리고 싶다. 총칼없이도 평화롭고, 큰돈 없어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싶은 건 너무 큰 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