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함대에 굴복한 일본, 후에 제주도 해역을 침탈

김유정의 제주도 29. 일본에 온 페리 흑선 

2025-03-18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미국 산업혁명 자원 확보
태평양의 고래잡이 관심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

현재는 미래이며 과거가 되지만 과거는 다시 현재에 되살아난다. 역사는 얼굴을 바꾸는 것 같아도 그 의미는 바뀌지 않고 다시 되풀이된다. 누군가 자작자수라고 했다. 그래서 역사는 자기 행동에 대해 언젠가는 꼭 되돌려주는 가혹한 심판자가 된다.  

△미국의 일본 개항 

모든 산업화는 문명의 새로운 얼굴이 된다. 농경사회에서 새로운 기계 문명의 도래가 있었는데 어떤 나라의 산업화도 단순히 하나의 경제적 현상에 그치지 않으며, 이미 새로운 기술 시대를 열어간다. 그렇지만 새로운 문명은 언제나 사회적 변화를 우발하는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과거와의 갈등이 나타난다. 

페르낭 브로델은 아시아 최초 일본의 산업혁명에 대해 "주군 없는 사무라이, 낭인, 가난에 찌든 무사들이 있었는데 산업혁명의 동력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 부랑자들이었고, 1853년 미 함대의 도착은 '화약에 불을 댕긴 불꽃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7월이 되면, 1853년에 공포의 검은 배를 몰고 온 미군 제독 메슈 C. 페리를 기리는 축제를 연다. 페리가 비록 일본을 무력으로 강제 개항시킨 침략자이나 결과적으로 일본에 큰 이득을 안겨준 인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방법들을 그대로 타국 식민지에 적용한다. 

한편, 19세기 전반 신흥국 미국은 유럽보다 몇십 년 늦게 출발했지만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 눈부신 기술혁명으로 인해 1840년대가 되면 규모 면에서 유럽보다도 더 큰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따른다. 

미국에서는 영미전쟁(1812~1814)이 종식되면서 미국 내 문제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유럽으로부터 값싼 노동자의 대거 유입되었으며, 철도와 운하, 증기선 등 운송 수단의 발전, 기술혁명, 서부 개척의 모험적 프런티어 정신. 풍부한 지하자원 등의 토대가 미국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다. 당시에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러시가 일어나 임금이 치솟고, 부족한 노동력을 중국 등에서 해결하기 위해 태평양 항로가 개설되었다. 그러니까 미국은 초강대국 영국의 손이 아직 덜 미친 중국 시장이나 태평양의 섬들을 노리고 있었다. 특히 기계나 펄프용 기름을 확보하기 위해 고래를 남획했기 때문에 향유고래가 격감하여 고래기름값이 급등하자 미국의 포경선들은 고래를 따라 서구 열강이 덜 미친 미개척 태평양에 진출하면서 일본 근해에도 출몰하여 급수를 요구하다가 쇄국정책에 의해 번번이 쫓겨나는 바람에 일본에도 개국을 추진하라는 높은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미국 정부는 최신 증기선 군함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하여 페리 제독을 대사로 임명하였다. 페리는 증기선 미시시피호 한 척으로 홍콩의 함대 집결지로 향했다. 대통령은 자기방어를 위한 발포 이외는 금지시켰다. 그래서 페리는 무기로는 최신예의 '대함대의 위용'뿐이라고 생각하여 규모를 키워 함선 12척을 요구했지만 모인 배는 1/3 수준인 4척만 배당받았다(佐久田繁, 2000). 

미국은 왜 페리를 태평양 개척자로 임명했을까. 이미 페리는 미국 해군의 전함과 해군사관학교의 교과과정을 현대화시킨 능력자이며, 두 번째 증기선 USS 풀턴 호 건조를 감독하면서 당시로서는 신무기를 선보인 탓에 '해군증기선의 아버지'라는 전설을 얻은 인물이었다. 그는 직접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서 멕시코 남부 타바스코 공격과 함락을 지휘하면서 현대화된 미 해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미국-멕시코 전쟁이 끝나고 1852년 페리는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로부터 프리깃 함대를 이끌고 가서 일본에 미국의 무역을 개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페리는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항을 출발, 대서양을 건너 케이프타운, 실론, 홍콩 마카오, 상하이에서 남태평양으로 남진하여 오키나와로 향했다. 당시 미국은 영국과 달리 중국에 기지가 없었던 관계로 페리는 나하(那覇)항을 새로운 미국의 해양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바쿠후와 절충하려고 1953년 5월 오키나와에 입항했던 것이다(佐久田繁, 2000). 

4척의 미국 동인도 페리 함대는 미시시피호를 비롯, 기함인 서스퀴해나호는 증기기관으로 수차 외륜의 힘으로 가는 배들이며, 다른 2척의 범선이 포함돼 있었다. 그 가운데 증기선 서스퀴해나호는 무려 2,430톤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최신형 함선이었다. 함선들은 검은색을 칠했다고 하여 일본인들은 구로센(黑船)이라고 부르는데 이 4척의 함선에 장착된 함포는 모두 61문이나 되었고, 미 해병 967명이 승선하여 함선의 운용과 현지 기지 건설을 도왔다(김석균, 2022). 

페리는 오키나와를 떠나 하코다테(箱館)에 고래잡이 전진기지를 건설하고, 1853년 7월 8일 에도항 앞바다에 검은 몸체를 드러냈다. 4척의 흑선은 연달아 공포탄을 쏘면서 항구에 몰려든 일본인들을 위협했다. 이에 놀란 일본군 포대 또한 대응 사격했지만 사거리가 짧아 미국 함선에는 한참 미치지도 못해 바쿠후는 점점 불안해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해군의 함선이 미국의 함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는데 겨우 100톤에 불과해서 고래 앞에 새우 신세가 되면서 자국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페리는 바쿠후가 저항을 포기한 사실을 알자, 미리 준비해 간 미 대통령의 서한과 자신이 쓴 서한 두 통을 내밀었다. 대통령의 서한에는 '난파 선원의 대우, 석탄과 생필품을 요구하는 선박에 피난항 제공, 간단한 통상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페리 자신의 서한은 노골적인 겁박이 담겨 있었다. "일본이 미국인을 적으로 대한다면, 우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내년 봄에 내항할 때 반드시 답변을 달라고 하면서, 다음번에는 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페리는 한 마디로 개항하지 않으면 각오하라는 협박의 말을 남기고 홍콩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개항, 가나가와 조약 

해가 바뀌자 페리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1854년 2월 13일 페리의 함대는 지난해보다 2배가 넘은 9척의 함대를 이끌고 에도 남쪽 가나가와에 상륙했다. 가나가와 해변은 우키요에로 유명한 호쿠사이의 '거대한 파도'가 배경이 되는 장소였다(M. Puchner 2024).   

가나가와 해변으로 상륙한 페리는 여러 차례 밀고 당기는 바쿠후와의 회담 끝에 마침내 1854년 5월 31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가 방문 항으로 개항되었고, 미국 선박들은 두 항구에서 일본 관리로부터 생필품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 후일에 영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나 통상조약 체결은 얻지를 못했다.

이 조약은 유럽, 미국, 중국 해안의 상인들은 페리의 성공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영국과 러시아의 제독들은 재빨리 이를 모방하였다. 지류가 본류에 합세하듯이 한번 허용된 조약은 연달아 달려드는 서구 열강들의 등쌀에 일본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 화친조약을 맺었고, 1856년 통상관계를 맺어오던 네덜란드와는 근대적 화친조약을 맺음으로써 네덜란드인들은 제한된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 전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해에는 미국도 화친조약을 맺고, 영사관을 설치하여 총영사를 파견했다.

미국 초대 총영사로 해리스가 부임하자 그는 곧바로 쇼군에게 영국과 프랑스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미국과 먼저 좋은 조건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자고 압력을 넣으며, 일본이 이를 거부하면 다시 함포가 올 거라고 하여 1858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뒤이어 줄 서고 있었던 영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미국과 유사한 통상조약을 맺었다(W.G. 비즐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