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여름의 로망스
걷기에는 폭염이 최악이다. 그나마 차로 이동하는 나들이라 표선면 인근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4·3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 나들이에 여러모로 마음이 착잡해졌다.
초등학교 한편에서 발견한 '폭발사고 위령탑'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1950년 음력 5월 29일, 30여명의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을 기리는 탑이다. 4·3 당시, 표선초등학교에는 주민들을 진압하던 부대가 3개월간 주둔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이곳에 수용되었던 주민들이 순차적으로 학살당한다. 군인들이 철수한 자리에는 폭탄이 묻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 측에서 새긴 추도문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부분은 "신상이 파악된 희생자들을 우선 정리하고, 추후 확인이 되는 대로 올리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희생되었으나 기억되지 않는 아이들이 반 이상은 된다는 이야기다. 작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p읍에 있는 초등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되었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이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220쪽)
발음하기도 어려운 '절멸'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었다니. 절멸의 의미는 완전히 끊고, 멸망시켜버린다는 뜻이다. 누구를? 빨갱이를. 이쯤에서 생각나는 음악이 있다. 영화 '금지된 장난'에서 흐르던 '로망스'이다. 포탄이 터지면서 아수라장이 된 전쟁의 한복판에서 죽은 강아지를 안고 헤매는 폴레트가 생각난다.
프랑수아 보이어(Francois Boyer)의 소설을 각색한 르네 끌레망 감독의 영화 '금지된 장난'은 1952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제7회 아카데미 외국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유명해서 사람들은 '로망스'가 흐르는 작품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40년 6월 남프랑스의 농촌 마을이다. 독일의 파리 공격을 피해 피난오던 폴레트(브리지트 포시 역)는 공습으로 부모를 잃고 죽은 강아지를 안고 헤매다 미셀(조르주 푸줄리 역)이라는 소년을 만난다. 미셀은 폴레트를 데리고 집으로 갔고, 둘은 강아지를 묻어준 뒤 무덤에 십자가를 세워준다. 지나가던 신부님에게 배운 애도의 방식이 십자가를 세워주는 것이라는 배운 폴레트는 죽은 것이면 무엇이든 무덤을 만들어주고 십자가를 세워준다. 새, 벌레…, 더 많은 십자가가 필요해지자 그들은 급기야 성당 제단에서, 형의 운구 마차에 꽂힌 십자가까지 훔쳐온다. 금지된 장난은 십자가를 훔치는 거였다.
결국, 폴레트는 적십자사가 운영하는 고아수용소로 가게 된다. 그녀를 데리러 온 수녀는 "우리와 함께 가면 행복해질 거야. 절대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라며 잠시 자리를 비운다. 그때 어디선가 미셀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콜레트는 반가운 듯, 당황스러운 듯 미셸을 부르며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이때 흐르는 음악이 로망스다. "미셀, 미셀, 미셀, 엄마, 엄마, 미셀, 미셀…. 끝없이 이어지는 콜레트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전쟁은 이렇게 순수하고 무고한 생명들에 생이별을 강요했다. 강아지의 무덤에 십자가를 세워주기 위해 손으로 흙을 파던 어린 소녀 콜레트의 씩씩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씩씩거림은 힘듦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어' 라는 의지가 역력했다.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어, 이 말은 미셀이 콜레트에게 한 말이기도 하지만 콜레트가 자기보다 더 약한 강아지의 죽음에 바치는 기도였다. 강아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렇듯 폭탄이 장난감인 줄 알았던 어린 생명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1950년 여름, 표선초등학교 소나무 밑에서 뛰놀다 사라진 서른 여남은 어린 영혼들에게 마음의 십자가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