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종이 남편의 첩이 돼 '마님'하고 부르더라도…
김유정의 제주도 48. 배수첩 <2>
인사관리 못하면 자기편도 적이 돼
4명의 얼녀 노비에서 양인을 만들어
신분사회 인간을 존중한 깨인 부부
△군주의 힘은 백성
역사는 모든 공간에서 일어나는 시간적 사건들로써 개인, 세대들에 연속적으로 일어나는데 시대마다 사람들이 생산에 대한 소유의 분배를 다투는 과정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내용과 규모에서 조금씩 형식은 다를지라도 내용상으로는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쁜 역사에 대한 철저한 청산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도 따지고 보면, 지난 시대의 나쁜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결과였다. 해방공간에서 동·서 냉전체제에 이용당했던 한반도의 비극적 고통은 여태껏 이어지고 있고, 몇 번의 독재체제가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것 또한 그것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우리들의 수난으로 되돌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전 국민이 고통받는 정치적 결과 또한 권력 엘리트들이 장기지속을 노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시대를 보건대 당시 광해군을 유배지 제주에서 맞닥뜨린 제주목사 신경호의 날카로운 경구가 귓가를 때리고 있다.
"당신이 임금으로 있을 적에 만일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들과 궁녀들을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왔겠습니까. 당신이 덕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편일지라도 곧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여종, 배수녀에서 배수첩으로
유희춘(1513~1577)은 자는 인중, 호는 미암이며, 1513년(중종 8) 12월 4일에 전라도 해남 출생으로, 본관은 선산. 그의 가문은 대대로 순천에서 거주했으나 아버지 유계린이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금남 최부 집안의 사위가 되면서 해남으로 이주, 미암이 태어날 무렵, 연산군의 암울한 집권이 끝나고 신진 사림들이 정치혁신을 꿈꾸던 시기였다. 유희춘은 1536년에 담양에서 부인 송종개(1521~1578)와 혼인을 맺고, 1538년 26세가 되던 해에 급제해 성균관 학유, 춘추관 기사관, 예문관 검열, 시강원 설서를 거쳐 부제학과 대사간을 지냈다.
그러나 명종 즉위년(1546)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서 이때 문정왕후가 윤임, 유관, 유인숙을 숙청하라는 밀지를 내리자 당시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유희춘이 그것에 부당함을 지적하는 바람에 파직됐다. 유희춘은 1547년(명종 2) 부제학 정언각이 양재역의 비방 벽서를 조정에 고함으로써 을사년(1545)에 저항한(을사사화 때) 인사들에게 죄가 가중됐고, 이때 유희춘도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유배형을 받았다(안동교·박명희, 2013).
전웅의 연구에 의하면, 유희춘의 정실부인은 남편이 떠날 때 긴 유배살이를 걱정해 자기 집 노비들을 딸려 보내면서 급기야 21살 난 남의 집 여종 구질덕에게 시중을 들게하고, 남편이 유배살이에 적응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도록 당부했다. 하지만 유희춘의 유배살이가 1년이 되던 해에, 조정에서는 제주도가 죄인의 고향 해남과 멀지 않은 곳이라 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지를 옮기도록 명령했다. 이때 유희춘은 이배되면서도 남의 집 여종 구질덕을 부인의 당부와 다르게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 첩으로 삼았다. 노비가 첩이 되는 것을 비첩이라고 하는데, 시중들던 배수녀가 배수첩이 된 것이다. 유희춘은 종성 유배지에서 배수첩 구질덕에게서 네 명의 얼녀들을 얻었는데 얼녀들의 이름을 유희춘의 고향 해남의 바다해(海) 자 돌림으로 나이 차례로 지었는데 해성, 해복, 해명, 해귀라고 불렀다. 정실 부인 송씨는 1남 1녀를 낳았다.
한편 부인 송종개는 유희춘이 유배 보낸 지 13년(명종 15년:1560년)째 되던 해에 노비들을 데리고 험한 여정에 올랐는데 걸어서 마천령을 넘어 석 달 여 만에 종성 배소에 도착하니 거기에는 자신이 딸려 보낸 여종이 남편의 첩이 돼 '마님'하고 부르면서 자신을 맞는 것이었다. 송씨는 무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마천령을 넘으면서 기대에 부풀어 지은 시 "만릿길을 부인이 무슨 일로 왔던가. 삼종의 의는 무겁고 내 몸은 가벼워지네!"라는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송종개는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전웅, 2016).
그후 5년이 지나서 명종 20년(1565) 봄 문정대비가 죽자 유희춘은 은진(현, 논산)으로 이배되자 정실부인 송종개가 배소에 와서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며, 이때 배수첩도 함께 자연스럽게 지냈다고 한다. 부인 송종개는 덕봉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을 만큼 문기가 뛰어나 송덕봉,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등과 함께 조선 4대 여성 문인으로 추앙받았다. 유희춘은 무려 2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1567년(선조1) 11월 55세에 사면받고 직첩을 환수받아 정5품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았다(전웅, 2016).
△배수첩의 딸들 양인으로 만든 선비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 복권된 지 1년 후 얼녀들을 불렀다가 결국 부인이 무서워 한양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딸들을 고향 해남 파다리에 보내 첩모와 배수첩의 남동생과 함께 살게 했다. 유희춘은 얼녀들을 상당히 사랑했던 것 같다. 급기야 그 얼녀들을 노비에서 양민의 신분으로 바꾸기 위해 속량을 치르고자 배수첩의 상전에게 사람을 보내 매매를 주선케 했다. 운 좋게도 배수첩 구질덕의 상전은 유희춘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전 은진 현감 이구였다. 조선의 노비제도가 종모법에 따라 어머니가 노비면 그 자녀들도 노비로 어머니와 같은 상전의 소유가 됐다. 매우 극악한 악법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 명의 얼녀들의 소유자가 각각 달라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매매됐거나 재산으로 분배된 것이었다. 유희춘은 남의 종을 첩으로 삼은 결과 어머니와 딸들의 상전들에게 신공의 대가로 쌀을 바치고 있었다.
유희춘은 우선 큰얼녀 해성을 상전 홍반에게 속량의 가격으로 말 한 필을 주고 양인을 만들었다. 조선중기에 해당하는 16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말 한 필 가격과 여종 한 명이 같은 가격으로 맞교환됐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말 한 필에 3명의 노비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가격이 세 배가 오른 셈이었다. 노비의 교환에도 선호도가 달랐다. 특히 남종보다 젊은 여종이 더 비쌌던 까닭은 여종이야말로 자식을 낳으면 상전의 소유가 되므로 쉽게 재산을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노비도 수지에 맞게 짐승처럼 사고 팔았던 것이다. 조선 후기 순조 때가 되면 여종 1명과 그녀의 자식 3명을 합쳐 25냥으로 사들인 사례가 있으며, 당시 말 한 필에 90냥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제주에서는 말 한 필의 가격이 장정 두세 사람과 같았다는 기록도 있었다(전웅, 2016). 인간의 가치를 타락시킨 조선의 결말은 패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혹여 제주에서 "아들 폰다. 딸을 폰다"라는 결혼의 어원이 과거 노비를 팔 때 쓰던 의미와 겹치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어쨌든 유희춘은 신분사회에서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 이어서 둘째 얼려 해복은 조그만 선물로 양인을 만들었고, 다시 셋째와 넷째 얼녀도 양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정신이 깨어있는 유희춘 부부는 부인을 존경해 동료라고 불렀으며, 부인 송종개 또한 남편을 지음(마음 통하는 벗)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녀는 배수첩과 얼녀들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는데 정실부인 송종개는 유희춘이 한양에서 홀로 벼슬살이 할 때 옷을 지어 보내면서 해남의 배수첩에게도 옷감을 챙겨서 옷을 지어주라고 했다. 유희춘 또한 해남의 배수첩을 위해 큰 집을 지어 살게 해주었다(전웅, 2016). 유희춘은 1577년 5월 15일 65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선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성균관 대사성, 대사헌, 여러 참판까지 청직을 두루 역임했다. 부인 송종개는 57살을 일기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