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배수첩을 두 번 들이다
김유정의 제주도 51. 유배인의 배수첩
유배인 후손들 명석한 사람 많아
구한말 감옥서에 넘치는 유배인
유배지에서 자유로운 고위 죄인
△어지러운 시대의 초상
천학인 내 기억으로는 대제학하면은 고려말의 청주한씨 한천과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회유책으로 대제학 벼슬의 제안을 마다한 양천 허씨 허손, 구한말의 청풍김씨 운양 김윤식(1835~1922)인데 대제학이라는 벼슬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추앙받는다. 공교롭게도 한천과 허손은 고려말에, 운양은 일제강점기(1916)에 마지막 대제학이었는데 이들이 공통점은 벼슬 말고도 이곳 제주에 유배를 왔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제주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 1%에 해당하는 작은 지역인 데 비해 교육열이 높고 명석한 인재들이 많다는 이유 또한 역사적으로 쟁쟁한 유배인들, 명문지사들의 선조를 두었다는 이유 또한 그 하나일 것이다.
운양 김윤식은 구한말의 고위 대신이었던 관료였다. 김윤식은 고종 31년(1884) 갑오경장 후 성립된 1차 김홍집 내각과 2차 박영효 내각, 그리고 다시 3차의 김홍집 내각에서도 외부대신을 역임할 정도로 친청파이면서 일본과도 화친하는 중도적인 개혁파였다. 김윤식의 자는 순경 호는 운양이다. 고종 11년(1881)에 문과에 급제해, 왕명으로 영선사가 돼 38명(학생 20, 기술자 18)을 인솔해 중국 톈진에 있는 톈진 기지국에서 병기와 과학 기술을 배우고자 했고, 이는 세계열강으로 포위된 조선의 미래를 깊이 깨닫는 사전 과정이자 정치가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국내 정세는 조선에서 득세하기 시작한 일본과 개화 정책에 반대해 1881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이 기회를 틈타서 청나라는 즉각 군대를 파견해 군란의 배후로 대원군을 지목, 납치한 후 조선의 전 분야에 걸쳐 간섭을 일삼았고 경제적인 침략의 흑심을 품고 '조청상륙무역장정'을 체결하는 등 국내 개화세력들에게 반청 정책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일본의 배후를 믿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위안스카이의 발빠른 군사개입으로 인해 삼일천하에 그쳐 버렸고, 김옥균을 위시한 공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은 더욱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자 조선 정부는 반청 정책을 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제풀에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개화파를 도와주고 조선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계획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실패로 좌절되자, 군사 개입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894년 전봉준의 갑오농민전쟁으로 위기에 내몰린 조선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청나라 군대 파견을 구실삼아 자신들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놀란 청나라는 조선 정부를 내세워 일본군의 철수를 주장했으나 한 번 쏟아진 물이 땅에 스며들듯 조선에 대한 흑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압도적인 승리로 이기고 말았다. 청일전쟁으로 말끔히 정리된 것은 조선이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앞으로 닥칠 한반도의 큰 불행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한반도의 등장으로 한반도와 만주 문제를 둘러싼 러일 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돼 갔다.
△운양의 제주 유배
예조판서로 있었던 김윤식은 갑신정변이 끝난 후 김윤식은 외교 문제를 다루는 외무독판(외무대신)으로 있으면서 광주유수를 겸임했다. 그 광주유수라는 자리는 조선의 주요 도시와 지방군, 도(島)를 담당하는 장관 자리였다. 그런데 일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고종 24년(1887) 부산첨사 김완수가 일본 상인으로부터 5천 엔을 차용했는데 그 돈을 약속한 기일에 갚지 못하자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마침 김윤식이 그 건과 관련해서 문서에 결재했던 것이 문제가 돼 '일상사째에 통서의 약정서를 발급했다는 사실이 국위를 손상했다는 죄를 물어 충청도 강진군 면천에 유배됐다가 2년 뒤인 1889년 다시 정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의 간섭으로 조선의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어지러웠다.
청의 높아가는 내정 간섭과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에 힘 받은 청나라 상인들의 횡포 때문에 조선 민중들의 반청의 분위기가 높아가는 가운데, 정치의 중심에 있던 김홍집과 김윤식 등은 정치적인 융통성을 발휘해 한편에서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민씨 척족 일파와 연대해 결국은 청나라에 기대면서 갑오개혁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해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정책에 기울어가는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이 사건의 처리가 문제시돼 김홍집 등은 맞아 죽고, 김윤식은 몸을 숨겼지만 들켜서 체포되고 말았다. 1896년 3월 김윤식은 경기도 광주의 방이동에서 죄를 기다리며 근신하고 있었는데 동년 6월 이종열의 상소와 탄핵에 이어서 이시우 등 50명의 거듭되는 탄핵이 잇따르자 1897년 12월 21일 끝내 제주도로 종신유배형이 내려졌다.
△유배인의 배수첩들
1898년 1월 6일 11시 기선 해룡선을 타고 인천에서 출발해 1월 11일 오후 8시 제주 앞바다에 도착해 제주 사람 김 오위장이 친척인 이선달 집으로 안내해서 미음을 먹고 쉬었다. 제주성 밖에서 1박을 하고 조반을 먹고는 북문을 통해서 제주성으로 들어갔다. 김윤식은 감옥에 가면서 한 명의 노복을 데리고 갔고, 이승오는 청지기 1명을 데리고 감옥서에 들어갔다. 김윤식과 함께 온 나머지 3명의 수행원은 북문 밖의 집에 머물게 했다. 그야말로 제주의 감옥은 유배인들로 붐볐다.
2월 말이 돼 김윤식과 이승오는 제주목사 이병휘의 호의로 40일 만에 감옥서를 나올 수 있었고, 교동의 토호 판관 김응빈의 집으로 안내됐다. 김윤식의 배소는 주변이 모두 유배인의 배소들이었다. 정병조의 배소는 김윤식의 뒷집이었고, 김사찬의 배소는 바로 앞집이었다. 당대 제주 유배인은 13명이었다. 감옥서에서 나와 며칠이 지나자 김윤식의 배소에 오경림이 왔다가 돌아갔다. 오경림은 역관 오경석의 동생으로 수년 전에는 제주관찰사겸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이 오경석이 아들이 독립운동가인 오세창이다. 3월이 되자 방성칠의 난을 일으켜서 화전세 혁파와 제주목사 이병학의 탐학을 민란의 이유로 삼았다. 이때 제주 목사 이병휘는 심하게 몰매를 맞고는 별도포로 피신했다가 기선으로 도망쳤다. 얼마 없어 제주목사와 대정현감이 파직되고 법부로 조사받기 위해 이송됐다.
김윤식이 제주에 유배됐던 동안 두 번의 큰 민란은 방성칠과 이재수 신축 민란이었다. 김윤식은 이들의 소요를 지켜보면서 유배인으로 연루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제주목 유배인으로 지내는 동안 유배인들끼리 이웃에서 살다 보니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직위가 높았던 이들인 만큼 지방 유지들도 찾아와 문안도 했고 기회를 열면서 고달픔을 달래기도 했다, 기생들도 자주 출입했다. 김윤식과 13명의 유배인에게는 죄인 생활이었다고 하기에는 현지 적응 생활과 비슷했다. 단지 변방이라는 공간적인 조건과 가족이 멀리 있다는 사실 아니면 크게 일상에 불편함이 없었다. 제주에 온 지 5개월이 돼 동네 사는 유배인 중 6월에 가장 먼저 배수 첩을 들인 자는 이승오였는데 기생 운항과는 몇 달이 못가 헤어지고, 다시 퇴기 취운을 배수첩으로 맞았다. 이때 이승오의 나이는 62세였다. 이듬해 유배인 서주보는 배수첩 향란에게서 서자가 아닌 서녀를 낳자 실망이 컸지만 안타깝게도 아기는 한 달이 지나 병사했고, 이듬해 향란마저 병사하자 1년 후 다시 배수첩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