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목장 관리는 별방진 조방장이 맡아
김유정의 제주도 54. 우도 <2>
우도 목장 설립 부역 늘어
섬 개경 하자 인구가 몰려
제주 부속된 섬 중 가장 유명
△우도의 입경 허가
우도가 가파도와 함께 개간을 허락받은 것은 1842년 이원조 목사 때였다. 당시 장부에 올라가 있는 우도의 말은 247필이었고, 가파도에는 소 70두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키우던 마소들을 방목하는 바람에 사람을 보면 놀라서 미쳐 날뛰므로 재갈을 물리기가 어려웠다. 섬의 마소들은 관리가 어려워 공헌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842년 2월 우도와 가파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조사했더니 우도의 넓이는 동서로 6~7리, 남북으로 10여 리가 돼 보리 종자 753섬지기를 우도에서 경작할 수 있고, 가파도는 동서로 5~6리, 남북으로 4~5리로 보리 종자 75섬지기를 경작할 수 있어서 가파도보다 우도가 10배가량 많았다. 조선의 작은 섬들은 방어 문제의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 대책 없이 섬을 비우고 있었다. 19세기가 되면 서양의 열강들은 동아시아로 다가오고 있었다.
16세기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바다로 눈을 돌린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아랍인의 중재 없이 아시아의 후추나 향료를 직접 수입하고 싶었다. 물론 더 높은 이윤을 노린 것이다. 포르투갈은 16세기 초 인도양 해역에 속한 동아프리카 모잠비크(1508), 인도 서해안의 고아(1510), 말레이반도의 말라카(1511) 등 여러 거점을 확보하여 인도양 역내의 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1581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을 겸임한 이후, 유럽 왕가들 사이의 전쟁과 기독교와의 전쟁, 아메리카 대륙 경영 등으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새로 진출한 네덜란드에게 인도양 해상무역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당시 펠리페 2세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바람에 포르투갈과 전쟁 상태에 있었던 네덜란드인들이 후추와 향신료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독자적인 항로를 개척해 직접 아시아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출신으로 네덜란드인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기독교에 종교적 자유를 거부하고 탄압하고 있었다.
1595년 5월 희망봉을 돌아 동인도로 떠난 네덜란드 선단이 2년 4개월 만에 돌아온 후, 북해 연안에서 무역과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층이 무역 회사를 세워 해상무역에 뛰어든 것이었다. 때로 경쟁만이 능사가 아니다. 힘을 모을 때는 경쟁도 피해야 한다. 더 큰 것을 위해서 전략적인 제휴가 필요한 것이다. 이 북해 연안의 지방과 도시의 6개 무역 회사들은 서로 경쟁을 피하고 오히려 합병해 1602년 연합동인도회사로 거듭났다. 이 연합동인도회사는 해상무역 전문회사로써 이후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여 17세기 내내 아시아 역내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사실 동인도 제도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아시아 대륙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분리하고 있는 바다 전체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말한다.
원래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보다 앞서서,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지만, 법인이 아니었고,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은 개인으로 구성된 조합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항해할 때마다 투자자를 모았다가 배가 귀항하면 그때마다 이윤을 정산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투자가 매우 정책적이어서 처음부터 출자 기간이 10년이나 되는 영속기업이어서 회사 경영이 합리적으로 운영됐다. 영국은 네덜란드를 의식했는지, 1613년에 3회의 항해, 혹은 그 이상을 결산 단위로 하는 수정합본회사로, 그리고 다시 1657년의 크롬웰 특허를 받아 오늘날과 같은 주식회사로 발전했다.
△우도의 설촌
17세기에는 우도와 비양도의 언덕에서 염소를 놓아 기르다가 19세기 중반에 사람이 살면서 이를 폐지했다. 우도에 목장이 설치된 것은 18세기였다. 숙종 23년(1697) 목사 유한명이 종마 암수 200필을 풀어 우도 목장을 신설했다. 백성들은 우도에 목장을 설치하자 더욱 자신들의 부역(賦役)이 많아져 원성이 높았다. 이유인즉슨 바다를 건너가서 숙영을 하면서 말을 관리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1702년 7월 13일에 제주 판관 이태현과 정의 현감 박상하를 대동하고 우도에 가 목장 내의 말들을 점검했다. 당시 말의 수효는 262필이며, 태우리 겸 보인은 23명이었다. 물은 귀해서 두 곳밖에 없었다. 이형상은 우도에 순력 간 김에 어룡굴을 답사하기도 했다. 이때에도 우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관리하는 해당 별방진 마을의 부역자들이 무척 힘이 들었다. 그들은 네 가지의 공포에 시달렸다. 바다를 건너 정기적으로 오가는 두려움, 언제 부닥칠지 모르는 왜구나 이양선의 침입, 산물이 거의 없는 관계로 물이 부족하고, 말의 생육과 사고·병사에 대한 책임이 그 불안의 요인이었다. 우도 목장의 관리는 가까운 제주목 별방진의 조방장이 감목을 맡았다.
철종 대에 이르러 우도 목장은 14명의 목자가 275필을 관리했다. 헌종 13년(1847) 우도에 입도한 섬 주민들이 목 장터로 경작을 넓히자 탐라영에서는 매년 가을마다 상속 1두락에 10두, 중속 1두락에 8두, 하속 1두락에 6두씩 세금을 받아 사복시에 상납했다.
정조대 우도 목장은 둔마의 수가 243필이고, 군두를 포함해 목자의 수는 39명이었다. 물은 6곳이었는데 이형상 때보다 4곳이 더 불어났다.
헌종 9년(1843) 봄, 우도의 마필 반출이 끝나자 사람들은 우도에 들어가 개간을 시작했다. 이듬해 진사 김석린이 이주(현재의 영일동)해 마을의 터전이 되었다. 한편 작자와 연대 미상의 「연평진술사건」이라는 문건에 '제주 김상령이라는 사람이 이 섬에 가난한 백성들을 이주시키려고, 1828년부터 운동을 벌여 1841년 우도의 마을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도에는 이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경작할 땅을 찾아 가까운 남해안의 섬으로 농경지를 찾아가는 가족들도 있었다. 입도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우도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알 수 있는 기록은 우도가 설촌된 지 60년이 지난 광무 8년(1904) 「삼군호구가간총책」 구좌면 연평리의 연호가 140호, 인구는 남자 295명, 여자 384명으로 합계 679명이고, 초가는 469간으로 나타나 있다.
1915년경에는 우목동이 상·하 우목동으로, 천진동이 동·서 천진동으로 나누어 줬고, 1927년에는 연평리를 두 개의 구로 나누어 구장제가 실시됐다. 즉 1구는 고수·삼양·전흘·주흥 등의 4개 동으로 이뤄졌고, 2구는 후해·비양·우목·천진의 4개 동이다. 그 후 1931년에는 연평리의 1·2구가 통합돼 다시 연평리 제로 환원됐다. 1949년 고수 동이 상·하고수동으로 나눠졌고, 1970년이 되면 후해 동이 영일동으로 개칭됐으며, 동년 2월에 중앙동이 설동됐다. 1986년 4월 1일 구좌읍 연령출장소가 우도면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에는 4개 행정리에 12개 자연마을로 나눠져 있다. 4개 행정리는 천진리·서광리·오봉리·조일리 등이다.
우도는 남북의 길이가 약 3.53km. 동서의 길이가 약 2.5km로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 동안의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제주도의 부속된 섬이다. 제주도 최대의 부속된 섬으로 면적은 602ha이며, 성산포항에서 동북쪽 약 3.8km, 종달리 두문포에서 동쪽으로 약 2.8km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