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에서 사계리로 옹기를 실으러 가다 실종
김유정의 제주도 56. 우도 4. 개경초기의 삶
말이 이사 가면 사람은 이사 와
일본 고토는 우도민 대표 표착지
왜인의 배를 타고 돌아온 귀환
△우도, 목장에서 밭으로
우도가 개경이 허락되기 한 해 전인 1841년 우도의 별둔마들은 여러 목장으로 분산 수용하는 계획이 조정에 보고되고, 1842년부터 입경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지만, 가경세가 문제였고, 마정 또한 여전히 격년 후(1843)에 예전대로 점락하는 조처가 그대로였다. 개경을 위해서는 목장의 말들을 이송해야 하는데 그대로 말을 골라서 보내라는 조치는 당시 조선의 어긋난 행정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개간도 힘들지만, 가경세 또한 문제여서 백성들이 우도에 이주하려는 자가 거의 없었다. 가경세란 원전(원 토지대장) 외의 새로 개간한 밭 세금으로 세수는 목관아의 공용으로 사용된다. 한편 동아시아 정세는 나날이 어지러웠다. 1842년 5월 영국은 상하이를 함락시키고, 8월에 청나라를 겁박하여 난징조약을 맺고는 5개 항구를 개방시키고 홍콩을 할양받았다. 이듬해 11월에 상하이를 개방시켰다.
제주목사 이원조가 떠나기 전, 1843년까지 우도에서 점검한 말의 숫자는 모두 230필이었다. 1841년 우도의 말 관리 장부에 오른 숫자는 247필이었고, 1842년과 1843년 두 해 동안 늘어난 말 21필을 더해 268필이 되고, 다시 거기에서 말 손실분 38필을 제하면 230필이 된다. 이 말들을 각기 다른 목장으로 분산시켰다. 우도는 사실상 입경 초기인 1843년까지도 여전히 말과 사람이 공존했다. 우도는 1842년 봄부터 개간이 허락됐는데 삼읍의 주민 누구나 땅이 없는 가난한 백성이 밭 소유를 원한다면 각 마을에서 문서를 작성한 명단을 보고, 이주할 대상자와 그 가족 수를 헤아려 땅의 규모를 정해주고, 밭의 소유 장부를 호적의 이름으로 기록해 소유권을 인정했다. 1842년 봄 우도에 입경한 사람은 몇 명이 안 돼 여름까지도 우도 개간은 100분의 1에 불과했다. 개간한 지 3년 후면 내게 될 가경세 때문에 이주를 주저하게 된 것이다.
입경 초기에 또 하나의 눈에 띄는 변화는 삼읍 사람들이 우도에 들어와 해초를 캐 가는 것이었다. 삼읍 사람들은 입경에 관심은 있으나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우도에 해초와 미역을 캐려고 자주 들락거렸다.
△빈발한 익사와 표류
개경 허가 4년 후인 1846년 한 무리 사람들이 배를 타고 우도에 들어왔다. 제주 일도리 한량 채철 등 5명은 9월 초4일 우도에서 해초를 베고 돌아가다 갑자기 몰아친 거센 바람을 만나 우도 앞바다에서 모두 익사했는데 최조이 시신만 해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또, 1850년 2월 20일 김녕리 사람 한명완과 양낙건 2명은 테우를 타고 우도에서 해초를 베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사나운 바람을 만나서 표류하여 2월 25일 밤에 일본 고토에 표착했다가 쓰시마를 거쳐서 그해 10월 초9일에 부산진에 도착했다.
1850년 8월 24일 조천리 가솔 부평련 등 10명은 작은 배를 타고 우도에 들어가 미역을 싣고 돌아오는 길에 우도 앞바다에서 거센 바람을 만나 침몰하여 6명은 간신히 살아나고 4명은 익사하여 시신을 찾지 못했다.
1855년 2월 23일 제주 하도리 유생 고명현 외 3명은 테우를 타고 해초를 캐러 우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풍랑을 만나 테우가 전복돼 우도 앞바다에서 익사하여 조경수의 시신만 찾을 수 있었다.
1855년 6월 18일 김녕리 서원 윤광록 등 5명은 우도에 가서 해초를 싣고서 김녕리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서남 대풍을 만나 표류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1857년 11월 초9일 우도 한량 백다기 외 2명은 옹기를 실어 오려고 우도에서 대정현 금물포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불어온 서북 대풍에 의해 표류한 지 석 달이 지나도록 행방이 묘연했다.
1866년 10월 14일 정의현 신산리 기패 고연신 외 6명은 농사를 짓기 위해 신산포를 출항하여 우도로 가던 중 갑자기 사나운 바람을 만나 돛대가 부러져 표류하다가 일본 고토에 이르렀다가 1868년 12월 초6일에 돌아왔다. 고토는 규슈 서북단의 나가사키현 서쪽 해상에 있으며, 고토열도라고 부르는데 다섯 개의 큰 섬(산)인 복강도, 구하도, 나류도, 약송도, 중통도 등으로 이뤄졌으며 주변에 140개의 유·무인도가 있다. 고토는 지정학적으로 고대부터 한반도와 중국에 진출하는 일본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고, 과거 왜구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다.
△우도리 사람들의 표류
삶은 실존이며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친다. 1870년 2월 초 제주목 동면 우도리에 사는 곁꾼 박관신은 같은 마을에 사는 곁꾼 고성진과 제주목 소속 작은 배를 타고 2월 초7일 아침에 곡식을 실어 제주목으로 가던 중 바다 반도 못 가서 서북풍이 크게 일어나 바다를 떠돌다가 2월 12일 저녁, 일본 히젠슈로(현재 나가사키와 사가현의 일부지역) 고토에 표착하였다가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1871년(고종 8)년 8월 24일 전라도 제주목 중면 우도리 농민 이순복외 17명은 제주목 경내에 있는 노와도가 해로에 있어서, 그곳에 비워둔 땅이 많기 때문에 개간할 목적으로 작은 배에 식량과 농기구를 싣고, 노와도에 가서 씨를 뿌리고 각자의 개간지에 쟁기질을 하고 28일 낮에 본토로 되돌아오는데 서북풍이 크게 일어나 키와 돛대가 부러져서 대양에서 표류하다가 9월 초3일 저녁 무렵 일본 고토 청방촌에 표착,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다.
1880년 10월 초5일 제주목 좌면 우도리에 사는 김영진은 제주목 소속 3파 삼선으로 화물수송업을 하였는데 우도리에 사는 물주 부주학, 김영악, 윤도원 등이 구매한 전복 1백 30첩, 복갑(조가비) 50석을 싣고 경상도 동래로 가서 팔 요량으로 운임을 정해 먼저 실은 다음, 좌면 무주포에 사는 물주 유성업, 김인춘, 김두하 등이 구매한 전복 200첩을 지나가는 길에 싣기 위해 무주포로 가려던 참이었다. 마침 우도리 주민 강평관 등 5명과 김 조이 등 자녀 5인이 무주포에 내려주기를 부탁하니, 식량과 그릇 등 잡다한 물건을 싣고서 12시쯤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서북풍이 크게 일어나서 배가 부서져 대양을 떠돌다가 10월 11일 저녁, 일본 지마군 서포촌에 표착했다가 1881년 1월 17일에 표착자 10인은 왜인의 배를 타고서 관소에 도착했다.
1879년 7월 27일에 제주도 우도 선주 윤맹학, 사공 최정록, 곁꾼 윤정학, 화정(배의 식사 담당) 김성보 등 4명은 제주 상인 최민, 강윤각, 김만송과 함께 동업으로 미역을 싣고 조천포를 떠나 내륙의 강경포에 도착해 곡물을 팔아서 쌀을 사고는 최민 등 3명은 먼저 제주로 돌아가고, 윤맹학 등 4명은 다시 육지의 짐을 싣고 경상도 장기포로 가다가 강풍에 표류하다가 12월 초3일 아침에 일본 석경도에 표착해 나가사키를 거쳐서 1880년 4월 23일 제주 김녕포에 도착했다.
개경 초기 우도의 상황은 타지 사람들이 테우를 타고 우도에서 해초나 미역을 캐고 돌아가는 길에 익사하거나 행방불명됐고, 또 우도리 사람들은 곁꾼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농사를 지으려 무인도에 갔다오다가, 혹은 장사차 가는 길에 표류당했다. 우도의 고단했던 역사가 그대로 배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