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세계의 기억’ 공인…‘기억의 집’ 청사진 그린다

세계기록유산 제주4·3... '기억의 집'을 짓다 <1> 프롤로그

2025-11-16     고기욱 기자

2018년 논의 시작, 7년 만의 쾌거

‘4·3은 말한다’ 등 1만4000여건 포함

기록관 건립 이제 첫걸음 뗀 단계

체계적 관리 시스템 구축 ‘시급’

수십년간 금기의 역사로 묶여있던 제주4·3이 70여년의 세월을 넘어 마침내 ‘세계의 기억’으로 우뚝 섰다. 제주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진실규명과 화해·상생을 위한 제주 공동체의 끈질긴 노력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았다. 이는 2018년 첫 논의가 시작된 이래 7년 만에 이뤄낸 값진 성과다.
하지만 ‘세계의 기억’이라는 빛나는 위상 이면에는, 이 소중한 기록물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할 기록관 건립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무른 현실이다. 등재의 기쁨도 잠시, 기록유산의 위상에 걸맞은 실질적인 관리 체계 구축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본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기록관과 기록관리 체계가 부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미 검증된 국내외 선진 사례를 심층 비교 분석함으로써 ‘제주형 기록체계’ 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향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등재까지 7년

제주4·3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 필요성은 4·3 70주년을 맞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현지 조사를 통해 3만8500여매의 방대한 자료를 입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2020년에는 도민과 유족들을 대상으로 민간 기록물 수집 캠페인을 벌여 400여건의 희귀 자료를 확보했다.

이와 함께 3년간에 걸쳐 19명의 진상규명 운동 참여 인사를 채록하는 등, 총 4만9635건의 기록물에 대한 아카이브 고도화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2023년 11월 유네스코 본부에 등재 신청서가 제출됐고, 마침내 지난 4월 11일(현지 시각 10일) 제221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등재가 최종 승인됐다.

이로써 제주도는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인류무형문화유산(해녀문화)에 이어 이번 세계기록유산까지 품에 안으며 ‘유네스코 5관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는 제주가 지닌 자연적 가치와 더불어,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역사적 가치까지 공인받았음을 의미한다.

△주요 등재 기록물

이번에 등재된 기록물의 공식 명칭은 ‘진실을 밝히다: 제주4·3 아카이브(Revealing Truth : Jeju 4·3 Archives)’다. 그 이름처럼 진실을 향한 끈질긴 노력을 담고 있으며, 모두 1만4673건의 방대한 기록물이 포함됐다.

이는 과거 문화재청의 ‘재심의’ 결정을 딛고, 4·3이 가진 ‘화해와 상생’이라는 세계사적 보편 가치를 부각하는 데 주력한 결과다.

등재 목록은 문서 1만3976건을 비롯해 비디오 538건, 오디오 94건, 도서 19건, 엽서 25건, 소책자 20건, 비문 1건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물로 구성됐다.

주요 기록물로는 국가폭력의 실상을 증명하는 군법회의 수형인 기록, 유족과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 도의회 4·3 피해신고서, 정부 진상조사 관련 기록물, 그리고 4·3의 참상을 문학으로 고발한 소설 ‘순이삼촌’ 등이 망라됐다.

특히 제민일보가 1990년 창간호부터 456회에 걸쳐 장기 연재하며 4·3 공론화의 불을 지폈던 ‘4·3은 말한다’ 역시 자발적인 진상규명 운동 기록으로서 그 가치를 당당히 인정받았다. 이는 4·3의 진실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낸 언론의 역할과 자발적인 시민사회의 노력이 세계적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4·3 당시부터 2003년 정부 공식 진상조사보고서 발간까지, 진실 규명과 화해의 전 과정을 담은 이 기록물들은 ‘20세기 비극에 대한 21세기 최선의 해법’이라는 세계적 평가를 받고 있다. 4·3을 ‘기억’의 역사에서 ‘기록’의 역사로 완성하고, 평화와 인권의 교훈을 미래세대에 전승할 확고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기록관 건립 ‘첫걸음’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뤘지만, 이 기록물들을 온전히 보존하고 미래 세대에 전승할 ‘기억의 집’ 건립은 이제야 첫걸음을 떼는,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제주도는 등재 후속 조치로 제주4·3 아카이브 기록관 건립에 착수했다. 4·3평화공원 인근 2만9990㎡ 부지에 총 295억 원의 국비를 투입, 2027년 준공을 목표로 하는 4·3트라우마센터 및 4·3국제평화센터와 연계해 기록관을 건립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기록관이 단순한 자료 보존·전시 공간을 넘어, 트라우마 치유와 평화 교육의 중심지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2026년도 정부예산안에 아카이브 기록관 건립을 위한 기본계획 및 타당성 조사 용역비(국비 2억원)가 편성되면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를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완공까지는 예산 확보와 설계, 건축 등 아직 갈 길이 멀다.

등재 이후의 과제는 명확해졌다. 이제는 ‘세계의 기억’에 걸맞은 '기억의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그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야 할 때다. 고기욱 기자

※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