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고요한 사유의 굴에서 들려온 시인의 목소리

2025-11-20     김영호 기자

윤봉택 시인 네 번째 시집 『삼소굴 일기』

제주 토종 시인 윤봉택(69)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삼소굴 일기』를 펴냈다. 2021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후 3년 만이다. 시집은 '전생' '내생' '비운다는 것' '눈설레' '아는 이는' 다섯 부로 나뉘며 모두 73편의 시를 실었다.

제목 '삼소굴'은 중국 동진의 '호계삼소' 일화에서 유래한다. 시인이 수행하며 머무는 아란야를 가리키는 말로, 세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유와 침잠이 이루어지는 내면의 거처를 뜻한다. 윤 시인은 이곳에서 명상과 간경을 이어가며, 고요 속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언어를 시로 옮긴다.

이번 시집의 정서는 허무와 무욕, 그리고 그 너머에 스며드는 따뜻한 생명 감각이다. "오고 감이 없으니 가고 옴도 없다"는 구절처럼, 그의 시는 공(空)의 세계를 노래하면서도 문득 세속을 바라본다. 고근산 바람결에서 스친 그리움, 곶자왈 자락을 울리는 새소리, 산 그림자 속에서 발견한 자기 얼굴 등 구체적 풍경 속에서 수행자의 삶이 잔잔하게 드러난다. 고요를 향하는 길과 그 길을 되돌아보는 마음이 긴 호흡의 시어로 펼쳐진다.

문학평론가 전해수는 이번 시집을 두고 "시인의 개인사로서도, 제주라는 섬의 지역성으로서도 시편들의 상징적인 의미는 가히 단순하지 않다"며 "삶의 기저에서 뿌리내린 마음의 터전이 상처 난 생명들을 따뜻하게 위무하는 '사유와 성찰'의 시집"이라고 평했다. 

개인의 수행 경험과 제주라는 공간의 정서가 겹쳐져,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명상적 시선을 이끄는 작품이라는 평가다.

1970년 해인사로 출가해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구족계를 받은 윤 시인은 1980년 환계 후 고향 강정마을로 돌아왔다.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문예사조』 신인작품상을 통해 등단한 뒤, 서귀포시청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문학 아시아 2024 문학상과 서귀포 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작품성을 다시 인정받았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육신이 흩어지는 그 시간까지 작은 욕심조차 내려놓고 싶다. 순간순간 이 삶이 아름답다. 살아 있음이 기쁨"이라 적었다. 수행과 시, 삶이 맞닿은 고백이 시집 전체의 결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삼소굴의 고요와 제주 산자락의 숨결을 한데 묶은 『삼소굴 일기』는 수행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미세한 떨림을 정갈하게 담아낸 시집이다. 산지니. 1만800원.
 


빛이 스며든 순간을 붙잡은 첫 시집
조선희 시인 신작 「숨길」

제주 출신 조선희 시인이 첫 시집 「숨길」을 펴냈다. 한그루 시선 52번째 책이다. 4부에 60편을 실어 일상의 미세한 결을 차분하게 포착한다. 가족의 기억과 소소한 풍경, 상실과 회복이 잔잔한 시어로 이어지며 삶의 체온을 다시 느끼게 한다.

표제작 '숨길'은 빛이 스치는 순간을 붙잡듯, 하루의 틈에서 마음이 머무는 자리를 찾아내는 감각을 보여준다. '시간 속을 달리는 기차'에서는 약통을 여는 움직임을 반복되는 일상의 은유로 삼아 다시 견딜 힘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다. 소멸과 새봄, 균열과 회복이 겹쳐지는 정서는 담담하지만 깊게 스민다.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조 시인은 2022년 「시인정신」으로 등단해 한라산문학동인과 제주문인협회에서 활동 중이다. "삶의 흔적들은 숨을 쉬는 출구"라는 그의 말처럼, 작은 순간을 시로 데려오는 섬세함이 시집 전체를 단단히 묶는다. 한그루. 1만원.


계엄의 언어를 문학으로 다시 묻다
『쓺-문학의 이름으로』 제21호

문학실험실이 계간 문학지 『쓺-문학의 이름으로』 제21호를 펴냈다. 이번 호는 "권력의 폭력과 성찰의 언어"를 특집으로 묶어, 계엄과 국가폭력의 언어를 문학적으로 반추하는 글들로 채웠다. 포고하고 선포하며 명령하는 권력의 서술어에 맞서 문학이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탐색한다.

특집은 칼 슈미트의 내전 개념을 언어의 문제로 확장한 김항의 글을 시작으로, 국민 직선 대통령제와 계엄의 정치적 기능을 검토한 김태환의 글, 헌법재판소 탄핵 판결문에서 드러난 법 언어의 취약성을 짚은 김연미의 글 등이 이어진다. 카뮈의 『계엄령』,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임철우의 『봄날』을 다시 읽으며 폭력·기억·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하는 글들도 담겼다.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는 코너에는 김나영·김이강·박지일·진연주 작가의 짧은 산문이 실렸다. 정치적 위기의식을 문학적 응전의 언어로 전환하려는 시도들이다.

올해로 11회를 맞은 '문학실험실 포럼'의 주제는 "'타자'로서의 외국 문학"이다. 해외문학파에서 전후 외국문학 세대, 김현과 바르트의 관계까지, 외국문학 수용과 한국문학 현대성의 변화를 짚는다.

시와 소설란은 김연덕·서영처·신용목·정우신 시인, 안윤·이주란·정기현·주이현 소설가 등이 참여해 각자의 창작 세계를 펼친다. <텍스트 실험 공간>에서는 서이제가 '제의 글쓰기' 양식의 「축문」을 선보이며 실험적 독서를 제안한다.

제11회 김현문학패 수상자로는 시인 심지아와 소설가 양선형이 선정됐다. 심지아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상상력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는 평가를, 양선형은 "반영과 환영 사이의 전위적 언어 구조물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작가의 수상소감과 작가론도 함께 실렸다.

신간 리뷰에서는 김솔 연작소설집 『순수한 모순』을 소개하며 "실재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황홀한 거짓의 향연"이라는 문학적 감각을 강조한다.

문학이 다시 폭력의 시대를 질문해야 하는 지금, 『쓺』 제21호는 권력의 언어를 돌아보고 문학의 자리와 역할을 묻는 두꺼운 사유의 장을 펼친다. 문학실험실. 1만8000원.


독일 정치교육의 체계적 방법을 담은 안내서
「독일 정치교육」

성공회대민주주의연구소·학교민주주의연구소·전국사회교사모임이 공동 기획하고, 학교시민교육교원노동조합 집행위원장이자 성공회대민주주의연구소 연구위원인 김원태 작가가 번역에 참여한 「독일 정치교육」은 독일이 세계 시민교육의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독일 학교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정치교육의 체계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독일 대표 정치교육 매뉴얼의 완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책은 정치교육의 철학과 역사, 교수학과 수업 방법, 매체 활용과 평가 방식 등 독일 정치교육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500쪽 분량의 참고서다. 특히 '문제 지향', '쟁점 지향', '가치·행동 지향' 등 핵심 교수학 원칙을 상세히 소개해 한국 정치·사회과 수업에서도 적용 가능한 실천적 기준을 제시한다.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사회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구체적 사례로 설명한다.

독일 정치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을 '정치의 객체'가 아닌 '참여의 주체'로 세운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다양한 관점의 자료를 검토하고 토론하며, 논쟁 속에서 스스로 판단을 구성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는 독일 사회가 전쟁과 독재의 경험 이후 민주주의를 일상 속에서 학습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온 역사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30여년간 학교·지역사회·시민단체에서 검증된 이 매뉴얼은 민주주의 교육이 시민적 책임과 참여 역량을 길러내는 과정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번역에는 정치교육·사회과교육 연구자들이 참여해 전문성과 신뢰도를 높였다. 용어 해설과 해석 가이드도 충실해 교사뿐 아니라 시민교육을 고민하는 일반 독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한국 교육 현장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비판적 사고의 부재', '토론·논쟁 문화의 약화' 문제를 돌아보게 하며, 민주주의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실천적 답을 제시한다. 살림터. 3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