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서고 문 열고 ‘한강’ 입힌 광주…4·3기록관, ‘확장성’이 관건
세계기록유산 제주4·3... '기억의 집'을 짓다 <2>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지하 1층 ‘개방형 보존서고’, 시민과 거리 좁혀
매체별 맞춤형 항온과 항습이 영구 보존 기본
10년 만에 서고 포화…설계부터 증축 대비해야
‘소년이 온다’ 모티브 특별전으로 대중화 제시
광주 금남로. 1980년 5월 항쟁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서 있다. 옛 가톨릭센터를 리모델링해 2015년 문을 연 이곳은 단순한 자료 창고가 아니다. 항쟁 당시의 피 묻은 태극기부터 시민들의 일기장, 외신 기자의 취재수첩까지 5·18기록물은 이곳에서 박제된 유산이 아닌, 지금도 관리되고 활용되는 역사로 존재한다. 제주4·3기록관 건립을 앞둔 제주가 광주의 ‘개방형 시스템’과 ‘콘텐츠 활용법’,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공간 확장성’을 벤치마킹해야 할 이유다.
△‘밀실’ 깬 개방형 보존서고
기록관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방성’이다. 통상 일반인의 접근을 제한하는 보존서고의 틀을 깨고, 시민들이 일부 직접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지하 1층에 조성된 ‘개방형 보존서고’가 그 현장이다.
이곳은 서고와 전시 기능을 결합한 공간이다. 관람객은 서가에 꽂힌 기록물 실물을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관람할 수 있다. 기록물의 물리적 안전을 담보하면서도, 시민들의 접근성을 보장하려는 운영 방식이다. ‘보존’과 ‘공유’를 동시에 추구한 광주의 사례는, 4·3기록관이 설계 단계부터 고려해야 할 공간 구성의 방향을 제시한다.
반면 핵심 시설인 5층 보존서고는 철저한 통제 하에 환경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종이 문서는 온도 20도·습도 50%, 필름류는 온도 2도·습도 30%를 24시간 유지한다. 매체별 특성에 맞춘 항온항습 시스템으로 산성화와 열화를 막고 있다.
△기록, ‘스토리’를 입다
기록을 어떻게 보여줄’것인가에 대한 해법도 광주에 있다. 현재 열리고 있는 ‘제45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특별전’은 기록의 활용 모델을 보여준다.
전시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모티브로 삼았다. 1부 <소년을 부른 사람들>에서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과 실제 기록물을 연결했다. 도청 취사반에서 활동했던 실존 인물 주소연 씨의 일기장 원본, 시민들이 작성한 성명서가 문학적 서사 위에 얹혀 전시된다.
건조할 수 있는 행정 문서나 기록물이 스토리텔링을 만났을 때, 방문객들에게 더 쉽게 전달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현장이다. 4·3기록물 역시 단순 나열을 넘어, 문화적 가공을 통해 세대 간 전승을 꾀하는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공간이 곧 증거…전일빌딩
인근 ‘전일빌딩245’는 ‘공간 아카이빙’의 사례다. 1980년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탄흔 245개가 발견된 이곳은 리모델링을 통해 원형을 보존했다.
10층 마루와 기둥에는 1980년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으로 생긴 탄흔 245개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후 추가 발견된 것까지 포함하면 모두 270여개에 달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식을 통해 확인된 이 흔적들은 그동안 신군부가 부인해왔던 헬기 사격의 진실을 입증하는 결정적 물증이 됐다.
관람객들은 설치된 ‘유리워크’ 위를 걸으며 발밑에 박힌 총탄 자국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록관이 문서를 통해 진실을 말한다면, 전일빌딩은 공간 그 자체가 증거가 돼 국가폭력의 잔혹성을 고발한다. 제주는 4·3 유적지나 학살터를 기록관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해 입체적인 기억의 공간으로 확장할 것인지, 전일빌딩의 공간 보존 방식에서 구체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제주도의회, 벤치마킹 ‘분주’
제주도의회도 해법 찾기에 나섰다. 지난 3일부터 이틀간 하성용 위원장을 비롯해 김기환 부위원장, 강성의·강철남 위원, 박호형 행정자치위원장 등 제주도의회 의원들이 광주를 찾았다.
방문단은 5·18기록관의 보존서고 운영 현황과 전일빌딩의 공간 활용 방식을 살폈다. 특히 기록물 수집부터 분류, 보존, 전시에 이르는 전 과정을 확인하며 제주형 모델 구축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하성용 위원장은 “5·18 진상규명 과정과 기록관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4·3기록관 건립과 추가진상보고서 검토가 더욱 전문적이고 투명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고기욱 기자
“기록관 단순 창고 아닌 연구·소통의 ‘플랫폼’”
[인터뷰] 김호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기록관은 단순히 과거 자료를 쌓아두는 창고가 아닙니다. 전 세계 누구나 접근해 연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어야 합니다.”
김호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은 제주 4·3기록관이 지향해야 할 가치로 ‘플랫폼’과 ‘확장성’을 꼽았다. 김 관장은 5·18기록관 운영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조언을 건넸다.
김 관장이 가장 강조한 것 중 하나는 ‘공간의 확장성’이다. 현재 5·18기록관은 개관 10년 만에 보존서고가 포화 상태에 이르러, 상무지구에 제2보존시설(통합보존시설) 건립을 추진 중이다.
그러면서 “기록물은 계속해서 발굴되고 생산되기에 공간 부족은 필연적”이라며 “제주도는 설계 단계부터 향후 30년 이상의 기록물 증가를 예측해, 증축이 가능한 구조로 공간을 확보해야 같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제언했다.
운영 주체에 대해서는 ‘공공성’을 역설했다.
김 관장은 “초기엔 민간 운영 논의도 있었으나, 방대한 개인정보 보호와 기록물의 영구적 안전을 위해서는 공공(지자체 사업소 등) 영역에서 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조언했다. 고기욱 기자
※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