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무대와 인연 남긴 원로 배우 이순재, 별세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원로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91세.
한국 연극·방송계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평생을 무대와 함께해온 그는 지난해 말 건강 문제로 잠시 활동을 멈춘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최근까지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연기 혼을 이어갔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했다. '동의보감', '사랑이 뭐길래', '허준', '이산', '목욕탕집 남자들' 등 시대의 흐름을 관통한 작품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남기며 대한민국 드라마사의 한 축을 이끌었다. 2000년대에는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코믹 연기의 새로운 개성을 펼치며 세대를 초월한 인기를 얻었다.
이순재는 제주와도 깊은 인연을 이어왔다. 2017년 서귀포 관광극장에서 열린 청춘토크콘서트 '청춘의 일과 꿈'에서는 제주 청년들과 마주 앉아 꿈과 세대, 삶의 태도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당시 "젊은 세대와의 소통은 배우로서, 한 사람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후 2023년 7월 15일 제주도문예회관에서 공연된 연극 '장수상회'에도 출연했다. 국내외 70개 도시에서 30만명이 관람한 대표 작품이다. 제주 공연에서도 그의 섬세하고 인상적인 연기는 큰 박수를 받았다.
이순재는 "제주 관객은 늘 따뜻하다"며 지역 무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공연은 결과적으로 그가 제주에서 남긴 마지막 공식 무대가 됐다.
정치와 교육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문화·교육 현안을 다뤘고,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나 그는 "배우는 무대에서 늙어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지켜왔다. 200분 대사를 홀로 이끈 '리어왕', 후배들과 함께한 연출작 '갈매기' 등 그의 끊임없는 도전은 한국 공연예술사에 깊게 새겨져 있다.
한 시대를 지켜온 원로 배우의 부재는 한국 문화예술계에 큰 상실이지만, 제주 무대와 남긴 흔적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김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