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삼별초때 항파두리서 쌀 문화 전파 주장도

쌀은 물을 대는 관개시설이 무엇보다 중요해 용천수가 풍부하거나 하천수가 흐르는 한라산 서남쪽의 애월, 한림·한경, 서귀·대정지역에 집중 분포됐다.

그러나 제주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관련 문헌기록이 없어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초의 문헌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제주목과 대정현에 나타난 조세를 부과하기 위해 논의 면적을 기록한 결수표시다.

반면 고려말의 벼농업 문화를 보유한 삼별초의 영향으로 벼농사가 시작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1996년 고려대학원 지리학과에 재학중인 고영기씨는 「제주도의 벼농사」논문을 통해 “장기체류를 위해 강화도, 진도를 거쳐 입도한 삼별초의 3년여 기간동안 벼농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병사들의 군량을 자급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좌·우 ‘둔전’(屯田)을 개발한 삼별초가 애월읍 항파두리에 주둔하며 수량이 풍부한 토성내 ‘구시물’을 이용, 논을 처음 만들었다.

고씨는 논의 유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소규모로 분할된 구시물 일대와 당시 군항이었던 「탐라순력도」상의 명월포 토지를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삼별초의 관개기술은 항파두성 내부를 흐르는 물을 막아 만든 ‘장털왓’ 유적에도 남아 있다.

고씨는 이후 패전한 일부 삼별초가 중앙통치력이 약하고 물이 풍부한 서귀포시 예래동에 도피, 재배기술을 전하면서 도내 벼농사가 동쪽으로는 강정동, 호근동(하논), 성산포, 종달리로 확대됐고, 서쪽으로는 사계리, 화순리, 신도리, 용수리로 확산됐다고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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