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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과 시간과 사물의 '사이'에서 살아간다. 세상과 세상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우리는 삶을 영위한다. 인간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를 지나가면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게 되고, 이 시간과 저 시간 사이를 지나가면서 새로운 순간과 시대를 맞게 된다. 또한 사물들은 세상의 가운데서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의 시간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사물의 잠겨 있던 봉인이 열리는 순간, 우리 곁의 일상적 사물들은 사소함을 넘어서서 폭넓은 가치를 드러내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우리의 삶 속의 일상적인 사물을 보다 가까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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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11.2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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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의 푸른 하늘은 산 중턱에 무심히 걸려 있었다. 하늘 저 멀리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간다. 독수리의 자유로운 모습은 흡사 억압과 구속에 얽매이던 누군가의 영혼이 환생하여 날아다니는 듯하다. 티베트는 인간 생존의 기본 요소인 산소마저도 모자라는 척박하고 험난한 곳이다. 해발 3700미터가 되는 라싸 공항에 내리면 벌써 숨이 헉헉 차오르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세계의 오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티베트는 세계와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신비의 땅으로 존재해 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티베트가 '죽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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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11.1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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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람이 분다. 인생에서도 세상에서도 문학에서도 바람은 계속 불어대며 우리를 못살게 군다. 바람의 인생, 인생의 바람, 바람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고. 그 길을 지나는 길에서는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 그러면서 당부한다. 바람에 대한 미련은 가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람은 인생과 세상과 우주를 흔든다. 바람은 능동적이고 격렬한 상태에 있는 공기이다. 바람은 창조적 숨결이며 발산하는 그 무엇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무색무취의 투명한 기체이지만 우주를 지배하는 일차적 요소이다.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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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10.2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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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이제 인간과 과학기술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일상용어가 되었다. 그동안 인간만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물인지 능력과 추론 같은 데이터 입력과 학습으로 인해 인공지능이 사람을 능가하는 결과를 생산해 내고 있다.인간의 지능을 인공적으로 구현한 컴퓨터 시스템을 '인공지능(A. I.)'이라 하지만, 오늘날에는 바야흐로 산업과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 인공지능이 적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오픈 AI가 출시한 챗 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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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10.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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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하던 여름이 지나고 한 해를 수확하는 한가위를 맞이한다. 사람들은 부모님과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슴이 부푼다. 고향이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은 일상의 삶이 지치고 피곤할 때마다 '돌아갈 곳'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내 존재의 근원인 고향, 그곳에서 우리는 어머니 품속에서 같이 나를 기대고 평안하게 숨 쉴 수 있다.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오디세우스는 그의 지혜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기나긴 유량을 거듭한다. 오디세우스처럼 인간은 언제나 고향을 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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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9.2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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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니, 길고 힘들었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가 보다. 가을을 흔히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지만 살 쩌야 할 것은 인간의 정신이다. 외국을 다니다 보면 공항이나 레스토랑의 공간에서 여유를 즐기는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책 읽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왠지 멋있어 보인다. 단순히 책을 읽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몰입해 있는 사람의 집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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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9.1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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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참으로 보잘 것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늘 보는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쳇바퀴처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매일매일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비천한 인생의 반복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하루를 무사히 보낸다는 것, 큰 사고 없이 편안한 나날을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란 말이 있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일들이지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밥 한 끼, 차 한 잔의 의미는 크기만 하다. 밥 한 끼,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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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9.01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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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마다 연두의 새잎이 돋아나오는 것을 보고 신기해한 것이 엊그제인데, 어느새 8월도 거의 지나고 신록은 짙다 못해 나뭇잎들이 검은 느낌을 주는 계절이 되었다. 40도 가까운 뜨거운 열기가 매일 힘들었지만 또 다른 계절이 곧 올 것이라 생각하면 위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이 다가왔다 떠난다.며칠 동안 장맛비가 내리더니 비가 그치자, 산등성이 너머로 무지개가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무지개는 햇빛이 공기 중의 물방울을 만나 굴절되고 반사되어 분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다.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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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8.1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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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계속되는 여름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올해 더위는 유별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이다. 실제로 폭염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물론 전 지구를 찜통으로 만들고 있는듯하다. 지구가 불타고 있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곧 폭발이라도 할 듯이 펄펄 끓고 있다.우리 눈앞에 펼쳐진 아마겟돈의 세상을 떠 올리지 않아도 이미 지구는 충분히 위기의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에 읽은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의 『2050 거주불능 지구』는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1세기 기후재난 시나리오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지구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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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8.0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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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비극인가, 희극인가. 유명한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고난과 슬픔을 가까이서 바라볼 때는 너무나 힘들고 비극적으로 느껴지지만, 시간이 흘러 전체적인 삶을 되돌아볼 때는 희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우리의 인생 자체가 비극과 희극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대성을 띨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채플린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인생을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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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7.2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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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현대인의 삶의 운명을 '유목민' 혹은 '유랑자'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들뢰즈는 정주하지 못하는 떠돌이로서의 유목민을 노마드(Nomad)라고 불렀다. 특히 현대 인간은 자유로운 시각을 지니고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로 옮겨 다니면서 낯선 세계와 영역을 끊임없이 넘나들기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노마드로서의 삶을 반영하는 노마디즘은 새로운 삶의 영토·방식·가치를 찾아 이동하여 낯선 것을 창조코자 하는 세계관을 반영하면서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노마드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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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7.0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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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시간에 접어들면 죽음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푸르디 푸른 청년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서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죽음이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외면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있지만, 죽음을 외면하고자 하는 이런 안도의 마음을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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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6.2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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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생로병사를 겪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청춘의 시간을 지나고 늙음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년이 지나 노년에 이르게 되면, 눈도 흐려지고 생각도 활기차지 못하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지게 된다. 이런 현상은 바로 늙음이 다가왔다는 표식이다. 그 푸르게 생생하던 젊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마침내 나에게도 늙음이 왔는가. 인간의 진정한 보석은 푸르른 젊음의 시간이었다. 젊음이란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자의 경쾌하면서도 열정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조금은 경솔하지만, 아낌없이 거침없이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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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6.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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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다시 왔다. 거리 곳곳에서는 정치 현수막이 휘날리고 특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가두 방송이 요란하다. '정치(政治)'는 우리 주변에서 항상 존재하지만, 때로는 추상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많은 사람은 정치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통령, 국회의원 같은 국가적 인물이나 선거같은 중대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정치는 단순히 특정한 사람과 활동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우리가 아무리 외면하고자 해도 정치란 사람들의 일상과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삶에 큰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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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5.2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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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체 부위 중에서 온종일 가장 바삐 움직이는 중요한 곳은 어디일까.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중요치 않은 곳이 없지만, 눈과 함께 가장 바쁜 신체 부위는 두 손이 아닐까 한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책을 뒤적이는 것은 모두 두 손에 의해서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스마트폰을 조작하며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는 것도 손이다. 손은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서로 다툰 후 화해를 위해 손을 내밀거나 누군가에게 축하하거나 위로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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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5.1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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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란 무엇인가? 부처를 부르는 여러 명칭 가운데 "여실히 오는 자 또는 진여에서 오는 자를 의미"하는 명호이다.여래는 산스크리트어로는 '타타아가타(tatha+agata)'의 합성어로, 단어 배합에 따라 해석에도 차이가 따른다. 타타(tatha)는 '진실'이라는 의미이고, 타타아(tataha-)는 '여시(如是) 또는 여실(如實)'이라는 뜻이다. 가타(gata)는 '가다'라는 뜻이며, 아가타(agta)는 '도달한다, 오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타타아가타'는 부처와 같은 길을 걸어서 열반의 피안에 도달한 사람, 혹은 진리에 도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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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4.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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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어디서나 항상 소음이 가득하다. 사람과 기계가 만들어 내는 온갖 소음이 갈수록 세상을 아비규환으로 만들고 있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가 힘들어 때로 고요한 장소와 시간에 빠져들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고요와 적요의 시간을 갖는 것은 우리 내면에 가장 심오한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우리의 주변은 물론 머릿속은 늘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타인과 연결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마음은 더욱 텅 비어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을 모두 놓치고 만다. 듣는다는 것은 이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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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4.1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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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에서는 범종 소리가 울리고 중생을 깨우치려는 어느 스님의 마음이 세상 저 멀리 퍼져나간다. 금속활자의 글자는 설법이 되고 향기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직지」는 1377년 고려시대 청주 흥덕사에서 고승이었던 백운이란 호를 가진 경한 스님께서 집필하여 쓴 책을 금속활자로 뜬 것이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만든 '성서'보다 78년 앞선 것이다. 「직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되어 2001년 9월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직지」는 원래 상하 두 권이었는데,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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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3.3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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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 재활용 수거장 근처에서 누군가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폐지 수거하는 할아버지가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집 근처 거리의 담벽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젊은 여자 결혼 주선'이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TV 뉴스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안 된 젊은이들의 탄식 소리,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댄 패륜의 소식들이 들려와 가슴을 답답하고 움츠러들게 한다.평소에도 '슬픔'이나 '절망' 같은 어두운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요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밝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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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3.1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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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세요?" 제비가 물었다."행복한 왕자란다.""행복한 왕자님이 왜 울고 계세요?""난 살아 있을 때 눈물 같은 건 흘린 적 없었단다. 하지만 이렇게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니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구나."아일랜드의 작가이며 극작인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동화 「행복한 왕자」에서 제비와 왕자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 동화를 처음 읽었을 때, 울고 있는 그가 왜 '행복한 왕자'라고 불리는지 그 역설적 의미에 궁금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나 황금을 지닌 부자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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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5.03.03 1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