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임철규 「죽음」
노년의 시간에 접어들면 죽음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푸르디 푸른 청년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서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죽음이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외면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있지만, 죽음을 외면하고자 하는 이런 안도의 마음을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여기고 지금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인간들을 "죽음으로 향하는 비본래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죽음을 마주한 채로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운에 맡기거나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 모른다.
얼마 전, 전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데이비드 호크니의 영상 미디어 작품에서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는 문구가 나온 적 있다. 죽음은 쉽게 생각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생각을 오랫동안 지속하기에도 어려운 주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죽음이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잘 사느냐 하는 질문만큼 어려운 질문 임이 분명하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것이므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는 명제로부터 비켜날 수 없다. 그러므로 잘 죽는 것은 당연히 잘 사는 것이라는 질문에 귀착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잘사는 것이 아닌 잘못된 죽음을 수없이 바라본다. 사람들은 너무나 사소한 일로 쉽게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소중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이웃을 살해하는 사람들, 학교폭력으로 인해 목숨을 끊은 학생들, 하루가 멀다 하고 잔인하고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본다. 너무나 흔히 헛된 죽음을 접하다 보니 사람들도 거의 죽음에 무심한 지경이다. 우리 사회는 날이 갈수록 잘못되고 헛된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순진무구한 부녀자와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그렇게 죽어가면서 존재로써의 삶과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다. 이런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죽음은 '악'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죽음은 마지막 순간까지 선이냐, 악이냐의 갈림길에 놓인 듯하다. 그렇다는 것은, 인간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면서 온갖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절망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철규의 「죽음」에서 설명되고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올바른 실행은 죽음의 준비'라고 말했다. 철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육체와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에 의지해서 '이성적'으로 사유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가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면, 철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죽음의 준비를 한다는 것, 죽음을 가까이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죽음이 가장 두려운 것은 사후의 정지와 소멸이기도 하지만, 죽고 난 후에는 좋아하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위대한 사상을 담은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철학적으로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의 하나이며 죽음의 문제에 대한 가장 유효한 답을 제공해 주기도 할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철학자와 시인들의 죽음에 대한 견해 중에서도, 예컨대 윤동주의 「서시」에서 읽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같은 구절은 언제나 깊은 감명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덧없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무가치한 것도 아니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우리의 삶이 빛나는 것은 반드시 삶이 영원하거나 무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언젠가 끝나고 소멸한다는 것, 유한하고 종말에 이르는 죽음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