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조 파치 「어느 현상학자의 일기」

우리는 세상과 시간과 사물의 '사이'에서 살아간다. 세상과 세상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우리는 삶을 영위한다. 인간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를 지나가면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게 되고, 이 시간과 저 시간 사이를 지나가면서 새로운 순간과 시대를 맞게 된다. 또한 사물들은 세상의 가운데서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의 시간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사물의 잠겨 있던 봉인이 열리는 순간, 우리 곁의 일상적 사물들은 사소함을 넘어서서 폭넓은 가치를 드러내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우리의 삶 속의 일상적인 사물을 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자. 사소하고 익숙한 그 사물이 바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고 삶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게 해주는 힘이 된다. 또한 우리를 새로운 세상과 이어주는 끈이 되게 한다.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고, 우리는 삶에서 늘 곁에 있던 사물들, 그것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다가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어떤 풍요로움을 느끼게 된다. 

일상의 중심에서 '사이'를 바라보고, 사물의 중심에서 '사이'를 바라보라. 반드시 지성이나 이성이 만들어 내는 단조로운 진리 외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풍요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사이'는 사물을 외형적으로만 파악하고, 보편화시키고 통일화시키는 단조로운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지점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 처음과 끝이 없는 중간 지대는 무한한 생성과 가능의 지대이다. 이러한 사이는 사물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나와 타자 사이에서 의미를 찾아보고, 그 너머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곳이다. 이러한 '사이'에서는 다양체가 생성된다. 

거대한 바닷물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물방울은 하나하나에서 다양한 의미의 발견을 가능케 한다. 그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그들이 바다에서 일렁이면서 만들어 내는 파도의 의미, 윤슬을 만들어 바다를 아름답게 만드는 힘은 모두 다양성의 조화로움과 종합에 의한 것이다. 

제주의 돌담은 엉성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그 엉성한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면서 견고한 통합을 이룬다.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돌담은 서로의 틈을 맞추어 가며 쌓아지는 유동적인 생성을 이룬 결과이다. 겉보기에 금방 쓰러질 듯 엉성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 쌓여온 자연환경에 견딜 수 있는 구조적 안정성과 지역적 환경에 적응한 결과를 이룬 것이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바꾸고, 경계와 경계 사이의 지점을 바라보면 잠재적 생성의 바다와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일상을 진부하다고 여기고 진리는 고정된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진부한 일상과 고정된 진리에 진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지점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는 판단하고 구별하기 위한 차이가 아닌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긍정의 차이들이 담겨 있다.

일상을 진부함이 아닌 매번 차이를 찾아가는 의미의 장소로 볼 때 새로운 삶의 의미가 생성된다. 진부함과 동일함의 일상이 아닌, 죽어있는 고정의 사물이 아닌, 끝 모를 잠재성을 지닌 종합으로 바라볼 때 삶은 새로운 의미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다양체로서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이 가지는 가치와 특성에 주목하며, 가능성의 발견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에 진정한 삶의 가치가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긍정하는 것만이 올바른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개된 이탈리아 현상학자 엔조 파치(Enzo Paci, 1911-1976)는 「어느 현상학자의 일기」에서 긍정과 부정 사이의 철학을 이렇게 이야기한다."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나는 사물의 불가침성과 불투명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말하면 '괄호치는 것'이며 에포케, 즉 판단중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 내가 말한 '아니오'는 나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세계에 대한 부정이다. (…) 의미들은 결정화되어 있고, 잠들어 있다. 나는 이 의미들을 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잠들어 있고 모호하고 감추어진 모든 것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긍정과 부정 사이, 빛과 어둠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에게 진정한 삶과 세상의 모습은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