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있던 자리 대나무숲, 10평 남짓 동굴 유해 11구

   
 
  ▲ 다랑시굴을 돌아 나오는 길. 사람들이 살았다는 대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다랑쉬오름은 말없이 역사를 증언해 주는 것 같았다.  
 
다랑쉬마을에도 여름은 있었다.

인적은 없었지만 집터임를 증명하듯 대나무들이 곧게 곧게 자라고 있었다. 옛 마을 전체가 푸른색으로 갈아입고 여름의 복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오름 자락에 내려앉은 다랑쉬마을은 북군 구좌읍 세화리 중산간에 위치해 있다. 4·3 당시 10여 호가 살고 있었으나 1948년 11월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폐촌’이 됐다.

마을의 중심이 된 팽나무 앞에는 2001년 세운 ‘4·3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도 팽나무를 중심으로 못 터가 여러 군데 남아있고 집터 주변 대나무군락들이 ‘사람의 마을’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랑쉬’는 마을도 중요하지만 4·3학살의 단면을 세상에 일깨워 준 ‘다랑쉬굴’을 찾아야 한다.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으로 6㎞, 해발 170m의 속칭 선수머세 지경에 위치해 있다. 기억을 더듬으며 준비해간 어설픈 약도만으로는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다랑쉬굴의 92년 공개 당시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기어서 겨우 들어갈 수 있는 10평 남짓한 동굴 속에서 11구의 유골들이 확인됐다. 이 중 여성 3명과 어린이 1명이 포함됐다. 이들은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피난민들이었다. 이후 확인결과 시신을 이미 수습해 간 희생자까지 합하면 다랑쉬굴 희생자는 최소 22명에 이르렀다.

공개 초기 경찰과 행정기관에서는 이들을 ‘불순분자’라는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 등 언론들의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1948년 12월 함덕에 주둔했던 9연대 2대대 군인들이 저지른 일로 밝혀졌다.

2대대가 동굴입구에다 불을 피워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질식사시켰다는 내용도 확인됐다. 실제 발굴된 유물들은 피난용품이다.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 물허벅, 요강 등 생활용품과 낫, 곡괭이, 도끼 등 연장류가 대부분이다.

92년 4월1일 연구소, 언론 등으로 구성된 합동 조사반은 다음과 같은 축문을 올렸다고 한다.

“무자년 섣달, 토벌대에 의해 굴 입구에 불이 질러지고 그 연기에 숨이 막혀 귀에 피가 나고 입으로 토하며 참혹하게 쓰러져 누웠을 11구의 조상님네들의 신원을 풀고자 함이옵니다. … 조상님네들의 삶을 다시 살리고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자 함이옵니다”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희생자들은 양지바른 곳에 묻히지 못했다. 행정기관 등의 졸속처리로 인해 유골은 화장돼 결국 김녕 앞 바다에 뿌려졌다.

하지만 유물들은 동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론 굴 속으로 들어가 확인 할 수는 없다. 행정기관이 나서 동굴입구를 콘크리트로 폐쇄했기 때문이다. 그 위로 커다란 암석까지 얹었다. 망각되기를 바랬던 셈이다. 웃자란 잡풀들로 암석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입구는 막혔어도 이후 4·3 순례자들은 이곳으로 발길을 이어내며 추모와 함께 새로운 다짐들을 하곤 했다.

지난 2002년 민예총 제주도지회는 다랑쉬굴 현지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해원상생굿을 지냈다. 다랑쉬굴 유골발견 10주년을 맞아 치른 행사다. 표석에 새겨진 발굴당시 사진 한 장과 굴 속 약도만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해준다.

넝쿨과 잡풀로 뒤덮인 채 숨어버린 다랑쉬굴. 이때 세운 표석마저 없었다면 찾기가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래도 순례자들은 물어물어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잠시 묵념을 하고 돌아 나오는 길. ‘대나무 숲’ 사이로 펼쳐진 다랑쉬 오름만이 역사를 증언하듯 외롭게 서있었다.

◎다랑쉬굴 보호방안은

매해 4월이면 발길이 이어지는 다랑쉬굴은 아직까지 뚜렷한 보호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는 다랑쉬마을과 연계해 보존방안을 찾자는 목소리가 높다.

제주4·3연구소 등은 정부차원의 심층조사를 통해 다랑쉬굴과 다랑쉬마을의 상황을 철저히 조사한 후 다랑쉬굴 일대 성역화사업 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1차적으로는 현재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서 있는 다랑쉬마을을 중심으로 한 인근 부지를 매입하는 방안 등의 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외지인들이 이곳의 토지를 상당수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어 정부가 나서 희생자들을 위무하고 4·3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가칭‘평화·인권기념관’을 설립, 미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한 다랑쉬 오름과 연계한다면 생태와 역사가 어우러지는 명소가 될 수도 있다.

이를 토대로 4·3평화공원을 정점으로 한‘4·3유적 벨트’를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92년 다랑쉬굴 공개 당시와 같은 행정과 정보기관의 작태는 이제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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