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순례] 9.주정공장

   
 
  ▲ 주정공장 옛터에는 매년 행방불명인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가 열리고 있다.<<김대생 기자>>  
 
‘… 발신인은 6·25가 터지자 인민군에 합류할까봐
어디론가 끌려가 집단 총살당해 암매장되었고
수신인은 소식을 알 수 없어 생일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대신 엽서를 놓는다 …’ <김경훈의 시 ‘엽신’ 중에서>

제주 4·3은 수 만명의 희생자와 함께 수 천의‘행방불명인’이라는 아픔을 잉태하고 말았다.

제주시 건입동 940-3번지 일대. 이곳 역시 4·3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옛 주정공장이 있던 자리다. 길 건너편에서는 제주항여객터미널이 보인다.

4·3 당시 입산 피난자 중 하산자들은 제주읍의 경우 주정공장(동척회사), 농업학교, 일도리 공회당, 용담리 수용소에, 서귀포에는 정방폭포 위 감자공장과 천지연 부근 창고에 수용됐다.

그 중 주정공장이 규모가 제일 컸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취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주정공장 자리에는 주유소가 들어서 있으며 수용시설로 활용됐던 고구마창고 자리는 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다만 지난 2001년부터 매해 4월 주정공장 자리에서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주최로 ‘제주4·3 행방불명인 진혼제’가 봉행되고 있다.

뚜렷한 영문도 모른 채 제주시 주정공장으로 끌려왔다 육지형무소로 이송된 후 행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추모하는 행사다.

1949년 5월 2일 당시 내무부차관 발표에 따르면 “3월 5일부터 5월 14일까지 귀순자 수는 6014명, 현재 수용자는 1851명”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모두 제주시지역과 서귀포의 수용소에 감금됐다 육지형무소로 이송됐다고 한다.

수형인명부가 공개되면서 소재가 파악된 경우도 있었지만 아직도 자신들의 가족이 어느 형무소로 끌려가 언제 어떻게 되버렸는지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망일자를 모르다보니 생일날에 제를 지내고 있기도 하다.

일부가 살아남아 제주로 되돌아오기도 했지만 상당 수는 서대문, 목포, 대전, 대구, 인천형무소에서 깨알같은 글씨를 담아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가 마지막이 되 버린 셈이다.

4·3유족회 등 행방불명인 유족들이 해마다 육지형무소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정공장에서의 삶은 어떠했을까.

1949년 5월 주정공장을 방문했던 ‘국제연합한국위원회’는 “수용소에는 2000여명의 수감자가 오래된 창고에서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여성 수가 남성보다 대략 3배나 많았고 팔에 안긴 아기들과 어린이들도 많았다”는 시찰보고서를 남겼다.

1949년 봄부터는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혹독한 고문후유증과 열악한 수용환경 때문에 주정공장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부상자와 임산부도 함께 수용했다.

주정공장 내에는 경찰 특수수사대가 상주하면서 귀순자들을 취조했다고 한다.

4·3진상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취조를 담당했던 한 경찰관은 “우리는 고문 할 때 고향사람들이라서 될 수 있으면 피했다. 육지에서 온 경찰들은 고문을 많이 했어. 어떤 경찰은 여자들의 옷을 다 벗겨서 천장에 매달아서 고문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4·3진상보고서는 또 “그냥 마을에 살다가 체포된 것이지 폭도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군인과 경찰이 수용소를 가끔 오갔지만 경비는 주로 대한청년단원들이 담당했다”는 당시 주정공장 직원의 증언을 기록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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