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순례] 13.제주중 초대교장 현경호 송덕비

   
 
  ▲ <사진=오지훈 기자> 제주중학교 학교 건물과 건물 사이 구석진 곳에 외롭게 서있는 "고 현경호선생송덕비".  
 
5일 일요일이라 아이들이 없는 제주중학교를 찾았다. 어제에 이어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에 교문을 넘어서자 퀭한 분위기가 운동장을 감돌았다. ‘고현경호선생송덕비’(故玄景昊先生頌德碑)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제주중학교 교정에 이 비석이 있다는 걸 알고 처음 찾은 방문객들은 다소 의외일 것이다.
송덕비가 교문 근처에 있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가기 때문이다.

현경호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의 송덕비는 운동장을 지나 학교 건물과 건물 사이 구석진 곳에 외롭게 서있다.

교실로 활용되는 건물 앞 화단 끝에 위치해 있다.
잘 정돈되지 못한 화단의 화분들과 오히려 조화를 이루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듯했다.
비석의 일부는 마모된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인가 상징하듯 충혼묘지 입구에 우뚝 서 곱게 단장된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본보 2004년 9월19일자 참조)와는 대조적이다. 국립 제주대학교가 대학발전기금 몇 억 냈다고 학교 본부 건물 앞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흉상을 세워주는 것과도 비교된다.

현경호 제주중학교 초대교장은 제주향교 이사장이기도 했다. 해방 후 제주향교재단에서 제주학교를 설립하자 1945년 12월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현 교장은 송덕비에도 명시돼 있듯이 ‘근면과 강직을 바탕으로 교육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도내 일부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제주 4·3 초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현 교장은 1947년 2월 28주년을 맞았던 3·1투쟁 기념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안세훈, 이일선과 함께 공동의장단에 취임하는 등 ‘역사의 정방향’에 서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동은 결국 탄압으로 되돌아 왔다. 1947년 소위 3·1발포사건 후 미군정청 포고령 위반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급기야는 소위 ‘제주읍유지사건’으로 인해 1948년 12월 농업학교 수감됐던 주민들이 희생터가 되 버린 ‘박석내’에서 희생당했다.

당시 박석내 희생자 중에는 현 교장을 비롯해 제주북교 교장을 지낸 김원중, 항일운동가 배두봉, 서울신문 제주지국장 이상희, 현 교장의 아들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제주중학교 송덕비문에는 죽음 등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교육애로 헌신하시다 1948년 12월23일 애석하게도 작고하셨으니 고인이 마련하신 터전 위에는 오늘 2천여 학도가 모이고 훌륭한 교육의 전당이 마련되었으니 선생님의 거룩하신 뜻과 더불어 이 땅의 젊은이들이 가슴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주중학교·제주상업고등학교장 명의로 된 송덕비가 세워진 시점은 1969년 12월이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 뜻을 기리고 싶은 심정을 이렇게 나마 표출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박진경 대령이 도민적 입장에서 ‘4·3탄압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듯이 현경호 초대교장에 대한 재평가작업도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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