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상에 필요한 말을 징발하여 제주목사가 최종 확인하는 모습.


 조선시대 제주도의 부자로 가장 잘 알려진 집안은 정의골 경주 김씨가와 조천포의 김해 김씨가를 꼽을 수 있다.조천 김해 김씨가는 한말이 가까워서야 두각을 나타냈지만,경주 김씨가는 이미 임진왜란 당시부터 조선후기 내내 제주도에서는 가장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이 번에는 먼저 경주 김씨가의 이야기를 해 보자.

 경주 김씨가를 일으켜 세운 중심 인물은 선조,광해군 시대를 살았던 김만일(金萬鎰)이다.그는 경주 김씨 입도조(入島祖)인 김검룡(金儉龍)의 7세손(世孫)으로 전국 최대의 목장지대였던 제주도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당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고 기르던 부자였다.김만일이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게 된 것은 그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그는 당대에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그가 부를 축적하게 된 과정에 관해서는 문헌 사료가 없어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이에 관해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다음의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김만일의 처는 강씨인데,강씨 집안은 말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상당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김만일은 양반 집안 출신이기는 했지만,매우 가난하고 아무런 재산도 갖고 있지 못했는데,강씨 집안에 장가들면서 많은 말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따라서 김만일의 말 소유는 처가로부터 받은 말을 성공적으로 관리 증식시킨 결과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선조 27)년 정부는 전마(戰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그 때 전쟁의 피해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따라서 전마를 보충할 방법은 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제주에서 기른 말을 가져가는 것이었다.그러나 해마다 정해진 수량의 진상마(進上馬)와 국영목장에서 차출하는 말로는 수요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따라서 개인이 소유하고 기르던 사둔마(私屯馬)를 징발하려 하였고,당시 가장 말을 많이 기르던 김만일이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하였다.정부가 김만일에게 전마를 요청하자,김만일은 기꺼이 500필을 바쳤고,그 뒤에도 광해군대와 인조대에도 정부의 요청에 따라 계속해서 말을 제공하였다.

 그 공로로 김만일은 높은 관직과 포상을 받았는데,1600(선조33)년 종2품 가선대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받았고,그 뒤 다시 정2품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세 번째로 말을 바쳤던 1629(인조6)년에는 다시 직급을 높여 종1품 숭정대부를 제수받았다.이같은 대우는 아무리 말이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이를 선뜻 정부에 바쳤다 해도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때문에 정부 대신 사이에서는 대우가 지나치다는 주장이 강했다.그러나 말의 헌납을 중요시 여긴 왕에 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따라서 김만일은 역대 제주인으로는 가장 높은 벼슬을 받았다고 여겨진다.남제주군 표선면 의귀리(衣貴里)는 마을 이름이 매우 특이하다.이런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그 마을에 살던 김만일이 높은 관직과 함께 관복을 왕으로부터 받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큰아들 대명(大鳴)에게는 수령을 제수했는데,보성군수를 역임하였고,둘째 아들 대성(大聲)에게는 당상관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데,실직(實職)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손자 여(礪)는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고 제주도의 변장(邊將)에 임명하였다.한편 인조대에 제주도 목장의 하나인 산마장(山馬場)을 감독하는 감목관 직책을 특별히 정하여 경주김씨 집안에서 대대로 세습하도록 특혜를 베풀었다.당시 관영목장인 관둔(官屯)을 관리하는 직책인 감목관은 판관과 현감이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10소장의 관둔은 3수령이 겸임하지만,산마장만은 김만일 집안의 감목관에게 감독권을 주도록 예외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따라서 수령들과는 달리 김만일 집안의 감목관은 ‘산마감목관’이라는 명칭으로 수여되었으며 관할하게 된 산장은 침장(針場:바늘오름 일대),녹산장(鹿山場:교래리 일대),상장(上場:마장 일대)으로 이루어진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주된 사무처인 관(館)은 산장 지대 안에 있는 교래리에 설치되었고,140여명의 목자(牧者)와 중간관리자인 수십명의 마감(馬監)·군두(群頭)·군부(群副)를 통솔하게 된 것이다.초대 감목관으로는 김만일의 셋째 아들 대길(大吉)이 임명되었으며,그 뒤 집안 사람들 가운데 적당한 인물을 6년마다 한번씩 문중회의에서 정의현감과 의논해 추천하면 정부가 그를 감목관으로 임명하였다.이 때문에 지역 주민들은 이를 두고 흔히 세습제라고 불러왔다.

 김만일은 왜 많은 말을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정부에 바쳤을까? 물론 국왕이 말을 바치라고 한 명령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사료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그가 왕이 명령을 내린 정도를 넘어서 훨씬 많은 말을 적극적으로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경제적 지위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그는 말을 바침으로써 상으로 관직을 제수받았고,자신뿐만 아니라 그 아들,손자들,나아가 산마감목관직을 대대로 세습하게 됨으로써 집안의 양반 신분을 튼튼하게 하고 제주도 내에서 지배층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차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함으로써 경제적 부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을 얻은 점이라고 생각된다.당시 제주도에서는 육지로 말을 판매하는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대체로 좋은 말 한 필이 노비 3명,또는 포목 50동(同)에 해당할 정도로 높은 값이었다.게다가 “제주 말은 그 값이 원래 비싼데다가 나주(羅州)에 오게 되면 이미 한 곱이 되고,다른 도에 가면 또 한 곱을 더하므로,사람들이 사기 어렵다”(「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5월 기해)는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아주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이 때문에 말을 함부로 빼앗아 부를 축적하려는 목사,현감,또는 군관들의 횡포가 대단했었다.목사들 중에는 민간에서 빼앗은 말을 중앙 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치는 자들도 많았다.때때로 중앙에서 말을 관리 확인하려고 파견하는 관리들이 들어왔는데,이들이 민간이 기르는 말을 함부로 빼앗아 착복하는 경우 또한 지방 관리를 못지 않게 심했다.

 김만일도 예외가 아니었다.제주섬에 귀양왔던 이건(李健)은 “좋은 말이 있으면 삼읍의 원님들이 다투어 빼앗아 가므로,만일은 종자가 끊어질까 걱정되어 일부러 눈에 상처를 내 봉사가 되게 하거나,병신을 만들어 잘 보존해 종마로 삼았다”(「濟州風土記」)고 적고 있다.따라서 이런 제주도의 상황에서 부를 지키고 살아 남는 길은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것이었다.김만일은 재산 가운데 상당 부분을 중앙정부에 바침으로써 자신은 물론 아들과 손자들까지 모두 관직을 수여 받았고,나아가 대대로 산마감목관직을 집안에서 세습하도록 된 것은 지방 관리들의 수탈에서 벗어나 그 집안의 부의 기반인 말을 자유롭게 기를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이었다.

 광해군 10년 점마(點馬)를 위해 파견한 경래관 양시헌(梁時獻)이 김만일과 아들 3명을 모두 잡아다가 형을 가했는데,이 소식을 들은 왕이 김만일 부자를 풀어 주고 오히려 양시헌을 처벌하였다.아마도 말을 수탈하려다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되는데,이는 그만큼 왕이 김만일 집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중앙정부의 보호가 실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당시 감목관이 종6품으로 현감과 같은 품계의 직책이었으니,그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자가 거의 없었던 제주 지역사회에서 그들이 갖는 사회적 위세는 대단했다.적어도 조선후기에 경주 김씨 집안만큼 높은 관직을 계속 이어가며 수여 받고 실제 업무를 수행한 집안은 제주도 내에서는 경주 김씨 말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주 김씨 집안이 대대로 산마감목관을 이어가며 담당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다.1702(숙종 28)년에는 김만일 가문에서 세습하던 산마감목관직을 폐지하고 정의현감이 겸임하도록 하였다.그 이유는 자손 가운데 목졸(牧卒)을 가혹하게 부리다가 원망을 품은 자가 중앙정부에 소장을 제출하였기 때문이었다.하루아침에 세습직을 잃은 경주 김씨 집안에서는 기회를 엿보다가 1719(숙종 45)년에 김만일 가문의 후손 김세화(金世華)가 한양으로 올라가 신문고를 쳐서 호소하였다.그 후 산마감목관 직은 다시 김만일 가문의 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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