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문서기록보관소 소장 제주4·3관련 문서 입수]

제주4·3연구소가 오스트레일리아 문서기록보관소에 소장돼 있던 제주4·3관련 문서를 5건이나 입수했다. 지난 6월 제주를 방문했다가 돌아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모리스 스즈키 교수로부터 입수한 것으로 미국이 아닌 제3국에서 4·3관련 자료가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4·3당시 유엔위원단 자격으로 한국에 왔던 캐나다와 영국 등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서들이 소장됐을 가능성이 높아 해외자료 발굴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집단학살 등 탄압피해 일본행

일본에 주둔했던 영연방점령군에 의해 1948년 10월25일 작성된 문서에는 일본 밀입국자의 인적사항과 직업, 밀입국 목적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문서에 따르면 1948년 6∼8월에 일본 에히메현 니시우와군 카와노이시 항구로 한국인들이 밀입국한 건수는 7건으로 전체 290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다른 지방 출신이거나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한 제주출신은 281명에 달한다. 남자가 115명, 여자가 75명이다.

이들 중에는 20살 미만의 10대 청소년과 유아도 68명이나 포함됐다. 직업별로는 농업 종사자와 학생·노동자·공무원 등 다양하게 분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한림 196명 △애월 37명 △대정 25명 △안덕 18명 △제주읍 4명 △중문 1명 △기타 9명 등이다.

4·3연구소는 “이들이 4·3당시 탄압을 피하거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제주도민들 4·3 잊지 않고 있으며, 잊지 않을 것이다”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제주도를 시찰한 뒤 1957년 8월 본국 외무성으로 보낸 문서에는 4·3당시 상황을 더욱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많은 주민들이 게릴라들을 은닉하거나 지원해 준 혐의로 사살됐으며 도민들은 이를 잊지 않고 있고, 잊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 문서에는 또 1957년 시찰당시 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군 규모에 대해서도 육군 180명, 해군 120명, 공군 20명, 미공군 170명이라고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 “상당히 전략적인 관심사항은 제주도가 중국 상하이로부터 270마일(에어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일전쟁 기간에 중국대륙 폭격을 위한 일본군 기지로 사용됐으며, 미군은 모슬봉에 레이더기지를 운용하고 있는데, 한반도 해안을 커버한다. 미군은 이 레이더기지가 상하이 공항까지 감시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경찰이 좌익을 만들었다”

1948년 4월29일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는 더욱 구체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보른 출신의 오스틴 스위니 신부와 도네갈 에이레의 패특릭 도우손 신부의 말을 인용해 “경찰의 야만성이 4·3사건의 주요 원인이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또 콜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12∼14년간 지냈고, 일제에 투옥된 경험을 갖고 있는 스위니 신부가 제주를 방문한 외신기자에게 “모든 이러한 소요의 유형이 러시아식 유형이지만, 경찰이 좌익을 만들어내고 있다”면서 “당신이 경찰에게 맞는다면, 당신은 자연히 폭도로 규정된다”고 말한 것도 지면에 옮겨놨다.

신문은 또 “이들 신부들은 ‘다른 지방에서 파견된 경찰이 일제 때 경찰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고 보도, 서북출신 경찰들의 악행이 심각했음을 짐작케 했다.

또 이 신문은 4월29일 딘 군정장관과 함께 제6사단장 올랜도 워드 소장이 제주를 방문했다고도 보도했다. 종전까지는 4·3 발발직후 열린 소위 ‘4·28 평화협상’ 다음날인 29일에는 딘 군정장관만 제주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워드 소장이 동행했다는 사실은 이번 신문보도가 처음이다.

이 밖에 1950년 1월27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본국에 보낸 문서에는 피난민, 한국 육·해·공군 현황 등이 기록됐고, 1948년 7∼8월 남조선 과도정부 활동 발췌 문서에는 “제주도 폭동사건 관련 250명이 경찰 유치장에 수감됐다. 판사들이 재판을 두려워한다”는 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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